내가 찌질한지 모르는 곳에서 다시 한번 찌질해지기 : 유학
밀레니엄이 도래했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은 세상이 멸망할 거라 하기도 했었고 또 다른 무리들은 파티를 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못한 채 유학을 가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이 시점부터 한국의 일반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패턴에서 조금씩 틀어진다.
사실 고등학교 졸업이라는 생애주기적 시점으로 누구에게나 변화가 큰 시기에 비행기로 10시간이나 떨어진 공간에 뚝 떨어진 채, 나는 아주 기본적인 언어부터 적응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지금 생각해보니 유학이란 아무도 내가 얼마나 찌질한지 모르는 곳에서 다시 한번 다른 식으로 찌질해질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나의 찌질함은 주로 향수병에 기원했다. 원대한 꿈보다는 도피 유학에 좀 더 가까운 그래서 뚜렷한 목적이 없는 상태였기에 조그마한 외부 자극에도 그렇게 서럽고 눈물이 나왔나 싶다.
얼마나 찌질했냐면 버스가 내가 서있던 정거장을 서지 않고 지나쳐 가는 그 순간, 모든이에게 외면당한 것 마냥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서브웨이 점원이 소스 종류를 물어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전교생에게 왕따를 당한 학생 처럼 한참을 서러워했다.
한 번은 내가 살고 있던 지역에 버스 파업을 했던 적이 있는데 파업이라고 해도 한 두대 정도는 돌아다니는 한국과 달리 파업 선언과 동시에 길에서 버스들이 사라지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덕분에 나는 학교를 가기 위해 한 달 동안 편도로 3시간 정도를 걸어 다닌 적이 있다. 지금과 같이 카카오나 네이버 지도가 있었으면 1시간이면 충분했을 거리를 아직 요령 없는 갓 고등학생 졸업생이어서 그랬는지 어쩌면 스스로 걷고 깊다는 생각을 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타고다녔던 버스 루트를 따라 꼬불꼬불 아주 오랫동안 걷기 시작했다.
북미지역의 주택가의 특성상, 대중 교통보다는 자가차량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아, 인도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 매우 한적하고 이따금씩 잔디에 스프링쿨러가 돌아가는 소리를 벗삼으며 한참을 걸어도 아득한 당시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막연히 이렇게 버스 루트를 따라 걷다보면 언젠가 집에 도착하겠지 싶은 막연함과 한적한 주택가를 두어시간 걷다보면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상상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막연하게 몇 시간을 걸으며 동생이 한국에서 보내준 믹스 음악을 들었었다. 그러면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전엔 별로 느껴보지 못한 감각적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들키고 싶지 않은 그러나 너무 선명하여 무시할 수도 없는 감정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외로움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분명했고 매우 또렷한 감정이었다.
너무 모호한 뭉탱이 감정이지만 생각보다 분명하게 내 안에 자리잡고 있어 도저히 무시할 수도 없었던 감정을 나는 어떻게 해소해야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감정도 적응이 되는 것인지 몇 주를 그렇게 막연히 걷다가 하루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하나 사서 걷는 대신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집에 가야겠다는 기특한 아이디어를 낸다. 인라인 스케이트 타는 법이 초반에 익숙치 않아 걷는날보다 더 시간이 걸릴 때도 많았고, 내리막길 같은 곳에서는 감정을 느끼기는 커녕, 넘어지지 않기 위해 온 몸의 감각을 발끝에 집중하니라 미처 우울해할 틈이 없었다.
그렇게 해야 할 행동의 방향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않기 위해 부지런을 떠는 것 말이다. 부끄러웠지만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도 가보고 오글거렸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스탠딩 네트워킹 파티도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하기 싫은 걸 안하는 삶이 참 행복하겠구나. 그렇게 스무 살 가을, 나는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현재 최선을 다한다는 감각보다는 하기 싫을 걸 하지 않기 위해, 나를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잘못된 습관이 고착화 된 시발점이 된 듯 하다.
마흔살이 넘은 나는 스무살의 나를 떠올리며, 당시 내 감정을 피하니라 직시하지 못했던 내 안의 욕구들을 십여년지 지난 지금에서야 바라볼 용기가 생긴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여담 : 버스 파업 때 신고 있었던 신발 한가운데가 갈라졌는데 그걸 보는 순간 일종의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다. 신발 하나를 갈라질 때까지 걸었다는 뭐랄까... 손에 잡히는 결과를 얻었다. 요런 느낌. 살면서 실증 나서 버리면 버렸지 어떤 물건의 효용가치가 떨어질 때까지 사용하는 경험히 참 드물구나 싶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