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론칭 이벤트 전날부터 마무리까지 벌어졌던
집에서 씻고 나니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내일 행사 때 입을 옷을 세탁소에 맡긴다는 걸 깜박했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신기하게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역시 감정도 에너지가 있어야 생기는구나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오늘 썼던 비용 그리고 내일 행사 당일 사용 될 금액 그리고 챙겨야 할 증빙들을 정리했다. 피곤한데 그냥 잘까 사실 몇초 고민을 하긴 했다. 회계 전문가가 아닌 내게 결국 회계, 재무 영역은 결국 제때 제대로 기록하는게 전부라 평소 믿고 있었고 또 사실 나중에 정리하려다 쌓이고 엉망이 되고나서 괴로웠던 감정이 퍼뜩 떠올랐다. 감정이 에너지가 없는 사람을 움직이기도 한다는 것을 또 다시 깨닫는다.
행사 당일, 알림이 울리지 않았는데도 4시에 깼다.
<행사 당일>
다행히 행사는 아무런 인명 사고, 화재 사고 없이 무탈하게 진행되어 밤 11시 쯤 마무리 되었다. 집에 돌아와 다시 영수증을 정리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 판매하고 남은 물건을 다시 물류센터로 보내야 하는 과제가 마음에 걸렸다. 행사 전날 했던 수고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내일은 호텔 체크아웃 시간인 12시 전에 모든 물건을 빼야 하는 상황이었다. 호텔 지배인 눈치를 보며, 직원들이 힘들어 하는 표정을 보는 그 동시의 상황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도달한 나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모두가 고생하지 않고 빠르게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을 머리속으로 수백 번 시뮬레이션 하기 시작했다.
1. 디스플레이 용으로 사용되었지만 씰링이 벗겨지지 않아 상품화 할 수 있는 제품 먼저 모아오기.
2. 최초 담겨왔던 박스를 모아 조립하고 상품가능성 있는 제품들을 규격에 맞춰 넣고 다시 실링.
3. 나머지 자질구레한 조무래기 제품들은 한 박스에 담되, 박스 위에 제품 리스트를 표기하고 붙이기.
4. 두번 째 퀵 아저씨를 불러, 상하차 다 해달라고 요청
5. 1,2,3 번 행위로 나온 제품 수량을 취합해 물류센터로 메일링
6. 호텔측에서 대여한 와인잔, 커트러리 갯수를 확인
7. 위 6번을 하면서 호텔 지배인을 미리 불러 객실키를 반납.
8. 같이 정리하던 직원들 점심은 꼭 먹여 보내기.
9. 일단 여기까지하면 시간에 쫓기는 일은 끝.
알람이 울리지 않았는데 또 잠이 깼다. 어제 행사 당일 계속 서있었더니 경추, 요추 모두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발바닥에 잡힌 물집이 터져버린 탓에 허벅지와 팔뚝의 근육통이 되려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자마자 보이차를 끓여 텀블러에 넣었다. 제주도에서 새벽 요가에 가기 위해 텀블러에 보이차를 따르던 이효리를 상상했다. 나는 지금 행사장 치우러 가는 사람이 아닌, 새벽요가 가는 사람이라 스스로를 속이다보니, 도저히 지하철을 탈 수 없어 에라 모르겠다 택시를 또 잡아 탔다.
행사장은 화려하고 시끌벅적하고 어제의 힙했던 잔상이 남아있으면서 동시에 쥐죽은 듯 고요했다. 전체적으로 어수선하면서 여전히 아름다운 공간과 피폐해진 몰골을 하고 보이차를 마시는 나의 꼬락서니가 기괴하게 어울렸다. 진행에만 몰두하니라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을 미처 꼼꼼히 살펴보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언제 또다시 이렇게 비싸고 아름다운 객실을 들어가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보이차를 마시며 공간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첫 의도는 공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찬찬히 살펴보고 싶었던 것인데, 중간중간 디스플레이 된 제품들을 보며 마음이 급해졌다. 디스플레이 되어있던 제품을 하나두개씩 챙겨 옮기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보이차를 마시며 공간을 둘러보고자 하는 마음과 모든 걸 빨리 정리하고 집에 가고 싶다는 양극단 욕구를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한번에 하나씩의 마음이 아닌 늘 양극단의 마음을 동시에 품고 사니라 이렇게 매번 뻘짓의 소용돌이를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자문하던 찰라, 직원들이 도착해 정리를 시작한다.
어제 자기 직전, 시뮬레이션 하던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행사 전날 불렀던 기사님을 미리 불러 기사님 혼자 30분 만에!! 제품 전량을 화물차에 적재하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계획했던 모든 것이 착착 돌아가는 상황이 그간의 육체적 정신적 보상을 받은 듯 해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물류센터에 메일을 보내더련 찰라..
애초 가져온 수량 : 350개
행사 때 판매 후 남은 수량 : 366개
????????????!!!!
제품을 세던 동료직원 분을 불러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황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나를 황망한 시선을 돌려줄 뿐이었다
몇 초전까지 분명 메뉴어트가 머리속에서 흘렀는데, 몇 초만에 공포영화에서 최종보스 귀신이 나오기 직전의 음향으로 순식간에 장르전환이 되었다.
“다시 세러 갑시다.”
메일의 ‘전송’을 미처 누르지 못한 채 노트북을 닫고 비장하게 말했다. 여직원 두명과 함께 집하장으로 내려갔다. 기사분은 이미 제품박스를 화물차 뒷편에 바둑판처럼 깔끔하게 적재해놓고 있었다.
“다시 세려구요”
나의 말에 미친사람을 본 것 처럼 나를 바라보았는데, 내가 미동도 하지 않자,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채고는 빠르게 다음 스케줄이 있다고 손절했다. 도와달라는 말은 이미 너무 많이 사용해 식상해질대로 식상해진 상황이었다. 어떤말을 더 해야하는지 정말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노트북을 어깨죽지에 끼고 서있다가 마음이 답답해져 그냥 기사님 가만 계시라 내가 올라가서 세겠다며 화물차 뒷칸에 올라탔다.
이미 세겹으로 적재되어 있던터라 가장 아래 깔려있는 박스에 표기되어 있는 제품명을 보기 위해서는 위 두겹의 박스를 다시 차 아래로 내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화물차에 올려두었던 택배박스를 내리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어 아무리 머리를 써도, 그 방법 말고는 다른 어떤 신박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것을 체념하고 가장 위에 박스부터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팔 근육이 “또 시작이냐” 며 근육통을 질러댔다. 행사 전날이 생각났는데, 신기하게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했다. 벌써 익숙해진 걸까? 한편으로 왜 이런일이 나에게 비슷하게 반복되어 벌어지는 것인지 어이가 없었다. 일하며 뻘짓한 이야기를 계속 쓰라며 온 우주가 나에게 소재를 던저주는 건가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무 생각이나 하며 택배 상하차의 무한궤도를 다시 타고 있기를 몇 분쯤, 기사님이 할 수 없다는 듯,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뒷 스케줄을 취소하는 전화인 듯 했다. 눈은 박스를 다시 세고 있지만, 모든 청각은 기사님 전화통화에 쏠려있었다.
“내려오세요. 제가 내려드릴께요.”
기사님이 전화를 끊자마자 내게 외쳤다. 나는 반색하며, 거절하지 않고 바로 화물차 뒷칸에서 내려왔다.
다시 내리고, 박스에 적힌 제품의 수량을 기입하고, 이미 집계된 박스에 마스킹테이프로 다시 표시하기를 몇십분, 그리고 내려놓은 박스를 다시 올리고, 또 올리고, 또 올리길 몇십 분. 기사님은 나에게 군소리 한마디 하지 않고 물건을 모두 내리고 올리더니 문자로 입금 정보를 보내고 사라졌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기사님” 하고 답문을 보내고 몇 분 뒤, 기사님으로부터 문자 한 통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