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퇴사 그 이후
2016년 여름 뜬금없이 같이 일하지 않겠냐는 제안, 그리고 연봉을 천만 원이나 후려쳤던 그 직장을 퇴사하기로 결심했다. 퇴사 이유는 ‘아이가 아파서’였다.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아팠던 것 아니었다. 6살 난 아들이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아랫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생겼었는데, 처음에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랫입술 밑 턱 주변이 거무스르하게 변할 정도로 빨아대고 있었다. 심란해하는 나에게 친정엄마는 어느 TV 프로그램에 나왔던 아들과 비슷한 행태를 보이는 케이스를 전했다. 욕구불만이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 그런 증상을 보인다는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확신에 차 이야기 했다.
하두 빨아대서 거무튀튀하게 멍든 아이 입술 밑, 턱주거리를 보며 나는 표면적으로는 아이를 걱정하는 듯했으나 아마 무의식적으로는 내가 회사를 정당하게 그만둘 수 있는 이유라 생각했던 것 같다. 사장은 회사가 어렵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아이는 영어 유치원을 보내고 자신의 엄마와 와이프에게는 벤츠를 사줬다. 그 가운데 매장은 턴오버가 심해 늘 사람이 부족했고 채용을 담당이었던 나는 안 그래도 일이 많은 매장직원들에게 늘 죄인 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냥 힘들어 도망가자니 수치스러웠다.
충분히 타인을 혐오해도 괜찮은 상황이었으나, 나는 내면에 뭐가 고장난 건지 나이스하게 작별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마음으로는 사장의 행위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 핑계를 대고 있었다.
퇴사를 하고 며칠은 해가 중천인데 집에 있는 것이 무척 신났다. 마치 학교 땡땡이를 치고 놀러 나온 아이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한 달이 지났을 즘, 실제 하는 일도 없이 몸이 무거워지고 전반적으로 만사가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퇴사를 하고 집에서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났는데 아이는 여전히 입술을 빨아댔다. 여전히 욕구불만이 해소되지 않았던 건지 잘 모르겠지만 동시에 나도 알 수 없는 욕구불만을 느꼈다.

하루종일 집밖으로 한걸음도 안 내딛는 중증 무기력증으로 진화했을 때, 기적처럼 오래전 같은 직장 동료분이 책모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안 그래도 한 자락 남은 이성 한 자락이 이렇게 더 집에 무기력하게 있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다는 경보를 울리던 차였다.
일주일에 한 번, 집에서 한 시간 반쯤 떨어진 광화문 어느 한 카페에서 책모임을 하게 된다. 첫 책은 아티스트웨이였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비몽사몽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노트에 적었다. 식구들이 미처 깨지 않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 잠도 미처 깨지 못한 상태로 사이즈 상관없이 노트에 3 바닥을 적어 내려가는 행위였다. 처음에는 “쓸게 없네, 할 말이 없네” 같은 의미 없는 자조로 세 바닥을 채웠다. 이렇게 의미 없는 소리를 반복해서 적어 내려 가던 초반에는 이 행위의 효용성에 대해 의심이 가득했다.
약 3주가 지났을 무렵, 나는 어느새 나의 욕구의 흐름을 또렷하게 적어 내려 가기 시작했다. 의식의 흐름에 집중하고 그대로 끄적이는데 어느 순간 보면 무의식 구석에 숨어있던 내면 깊숙이 똬리 치던 것들이 글로 표현되고 있었다. 사실 발견이라는 단어보다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나, 인지하고 바로 정리되지 않을 것 같은 감정들을 무시하고 사는 편이 편했겠지. 그래서 의도적으로 뭉개고 있었던 것들이 드러나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2023년 1월, 새해에 2016년에 겪었던 괴로웠던 직장 경험을 쓰는 것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입술을 시퍼렇게 멍들었던 아이 핑계를 대고 퇴사했던 그 과거 회사의 사장과 2021년 다시 일하겠다는 바보 같은 결정을 다시 했으며, 2022년 9월 다시 그만두면서 2016년에 일했던 그때보다 더 힘들게 퇴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016년에는 처음이라 몰라서 그랬다 치겠으나, 2021년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하겠다 결심한 나란 사람의 치기 어림과 나이브함을 이제 정확하게 직시하고 낱낱이 까발려야 한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2016년에도 상식에 벗어난 직장이었는데, 그 직장의 사장과 왜 2021년 다시 일하게 되었을까.
나의 결정에는 무엇이 결여되었으며, 어떤 속물근성이 있었을지, 끝까지 고개 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쓸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