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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May 24. 2024

이런 일은 너무 일찍 시작하지 마

[센텐스로그#11]

이십여 권의 책을 침실 소파 화장실 등에 제멋대로 쌓아두고 찔끔찔끔 병렬 독서 중이었습니다. 사실상 병렬 독서도 아니고 책을 병렬로 진열해 둔 상태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죠. 그런데 문득 제가 구독하고 있는 여러 가지 콘텐츠 구독 서비스들도 병렬 상태라는 자각이 들었습니다. 매월 열심히 구독료를 지불하는 것만으로 읽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어요.

하나씩 해지하면서 앱을 삭제했지만 웹툰 앱만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삶 속 병렬 독서 루틴이 자리 잡은 건 최근의 일이 아니더라고요. 한 작품이 완결될 때까지 동기간 함께 읽었던 만화책이 한두 권이 아니었어요. 서론이 길었지만, 오늘은 무수히 병렬로 읽어오던 웹툰 중 기억에 남는 두 편을 소개해 드리려고 해요. 


<똑 닮은 딸>은 누군가 웹툰 추천해달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길소명이 어렸을 때 동생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는데 사실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범인이 엄마일 거란 의심을 품기 시작하면서 전개되는 범죄 스릴러에요. 기승전결의 구성과 떡밥 회수도 완벽하고요. 무엇보다 각 인물의 심리와 관계도가 정말 세밀하게 묘사됩니다.


주인공 엄마, 명소민은 싸이코패스에 가까운 캐릭터에요. 그런 엄마에게 공감하게 되었던 에피소드가 있었는데요. 모든 면에서 잘 나가던 명소민이 임신을 기점으로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것에 차질이 생기고 남편과 싸우는 장면입니다. 




명소민의 프라임 세포는 “나는 절대로 옳다"인데요. 후회도, 반성도 할 줄 모르는 최강의 나르시시스트에 가까운 그녀는 임신, 출산으로 생전 처음으로 무력감과 패배감을 느끼죠. 엄마 명소민 통제권 안에서 고분고분한 완벽한 반려일 거로 생각했던 남편이 자신이 극도로 취약해져 있을 때 갈등이 일어나요. 직접 읽어보셔야 진가를 알 수 있는 웹툰이라 구체적으로 더 소개는 하지 않을게요. 현재 완결된 웹툰이라 마음 놓고 즐기시면 됩니다. 


그다음은 <도무지, 그애는>이라는 청년, 중년 그리고 노년 여성의 노동에 대한 웹툰입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주인공은 ‘도무지'라는 여성이고요. 지극히 소심한 심성을 지닌 주인공이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었다 계속 거절당하고 결국 마트 시식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세상에 적응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무지는 작곡가를 꿈꿨던 사람인데요. 이렇게 꿈을 가진 사람이 현실과 어떻게 타협해 가는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따뜻한 공동체에 섞이며 어떤 식으로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가 매회 이어집니다. 


모든 에피소드가 감동적이지만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제82화 - 인생은 마치 뽑기 > 편이에요. 무지가 힘들었을 때, 찰나의 순간 무지에게 온정을 베풀었던 사람과 추억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




안쓰러울 만큼 소심하고 답답한 무지가 마트에 적응하려고 매일 용기를 내는 그 과정이 마치 맞지 않는 직장에 저를 꿰맞추려고 노력하던 때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고 생각했고요. 지금은 예전보다 직장에 저를 꿰맞추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느끼는 건 제 삶 한켠에 좋은 어른들이 존재했기 때문이 기억할 수 있었던 웹툰이었어요. 


네이버 웹툰! 그리고 마치 명치를 맞은 것 같은 충격과 감동이 있다! 이 두 가지 공통점을 제외하고 장르와 내용 그리고 그림 톤도 매우 달라요. 그런데 저에게는 두 개의 웹툰이 작년 저의 감정과 생각의 흐름에 가장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즉 저의 감정 그리고 사고의 흐름이 굉장히 상이한 이 두 개의 웹툰이 같이 떠오르게 만든 거죠. 


작년 저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한 제약회사 빌딩에서 청소했어요. 번아웃으로 퇴사한 뒤 생애 처음으로 통장에 꽂히는 돈이 0원이 되었지만 불편하거나 전혀 조급함 없었던 때가 있었는데요. 그렇게 무위의 상태로 집에서 책만 읽으며 살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똑 닮은 딸>의 명규민과 길규온의 갈등과 흡사한 소소한 토론(?)을 저의 동거인과 나누고 바로 청소일을 시작했어요. 


얼핏 극단적이고 즉흥적으로 보이는 고작 두 달간의 일 경험이 결과적으로 저에게 ‘노동'에 대한 인식의 변곡점이 되었어요. 그리고 이 이야기를 내가 잘 풀어낼 수만 있다면 저 스스로는 당연하고 불특정 누군가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빌딩 청소를 하러 첫날, 일하시던 여사님들이 제게 말씀하셨죠. 





<도무지 그애는>에서 무지가 만난 좋은 어른들처럼, 저도 앞으로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끊임없이 보고 쓰는 이 행위들이 누군가에게 아주 조금, 티끌만큼은 위안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번 주부터 한 부씩 올려드릴 저의 <노동해방일지> 좌표를 공유해드립니다. 


누군가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가닿는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며



written by 진짜로 노동에서 해방되고 싶은 룰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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