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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성 May 27. 2024

드랙퀸과 티베트 노승에게 배운
어린이와 사는 법

[센텐스로그] 서로 다른 고유한 존재일 때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


아주 다른 두 어린이와 사는 건 매일이 배움이고 성장입니다. 불혹이 가까워져 오는 이 나이에 뭔가를 배우고 성장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는데요. 자고 일어나면 달라지는 두 어린이의 변덕과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벌어지는 잦은 변수가 열반을 향한 배움과 성장을 부추깁니다.


불혹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두 어린이 앞에서 매일 흔들리고 갈팡질팡하는 나를 보며 부모로서 ‘이게 맞나' 싶은 날도 많습니다. 그럴 땐 베스트셀러 육아서나 금쪽이를 기웃거려 보기도 하는데요. 모두 다른 양육자와 변수 많은 양육법을 틀에 맞추려는 듯한 단언과 마치 혼쭐이 나는 것 같은 솔루션에 이내 마음이 돌아서고 맙니다.


좋은 소릴 해줘도 내 마음에 차지 않으면 받아먹을 줄 모르는 반골 기질 다분한 양육자. 이런 피곤한 제게도 부모로서 배우고 싶은 가르침을 준 롤모델 같은 몇 사람이 있는데요. 오늘은 그중 두 사람 대해 얘기해 보려 합니다. 드랙퀸과 티베트의 노승.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을 관통해 전해진 울림이 있었죠.


다큐멘터리 영화 <다시 태어나도 우리> 한 장면


인간이 사는 가장 높은 고원 라다크. 인도 북동쪽에 속해있지만 티베트에 더 가까운 역사와 문화를 가진 곳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라다크의 동자승 앙뚜와 노승 아르갼의 이야기입니다.


티베트 불교에는 전생에 고승이었던 사람이 환생한다는 믿음이 있는데요. 그를 ‘린포체'라고 부릅니다. 동자승 앙뚜는 6살 때 그의 전생을 기억해내 린포체가 됩니다. 문제는 앙뚜가 전생에 티베트 시골마을의 사원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곳의 제자들이 린포체를 데리러 와야 하는데 티베트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고 있어 쉽사리 오도 가도 못하는 땅이지요.


전생의 사원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자 마을 사원에서는 앙뚜를 쫓아냅니다. 앙뚜의 스승이었던 노승 아르갼은 사원 밖 초라한 단칸방 암자에서 홀로 그를 돌보기로 합니다. 매일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지극정성으로 앙뚜를 돌보는(‘모신다’고도 표현하더군요) 노쇠한 스승. 눈이 쏟아지는 날이면 학교 앞까지 찾아가 앙뚜를 기다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앙뚜와 공을 차고 눈싸움을 합니다. 불경 공부도 절대 게을리하지 않고요.


점점 마을 사람들의 불신이 깊어지고 앙뚜는 정체성에 혼란이 오고야 맙니다. 끝내 아르갼은 앙뚜를 전생의 사원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티베트로 향하는 3,000킬로미터 대장정 도보여행을 시작하는데요. 2개월이 넘는 이 긴 여정도 고행에 가깝습니다. 발이 푹푹 빠지는 하얀 설산에서 서로만을 의지한 채 앞으로 나아가는 노승과 동자승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눈물이 차오르는 건 저뿐인가요. 잠시 눈물을 닦고 다시 얘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앙뚜를 향한 아르갼의 무조건적인 믿음과 헌신은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습니다. 의심받는 린포체를 돌보는 건 그에게 어떤 부와 명예도 가져다주지 않았거든요. 앙뚜의 린포체 교육을 허락한 티베트 근처 사원에 앙뚜를 두고 떠나는 아르갼의 결정은 그래서 더 놀라웠습니다. 앙뚜의 성장과 독립을 위해 이별을 택한 노승이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아르갼이 앙뚜를 모시게 된 것이 자신의 “운명이거나 업보”라며 "행복한 일”이라 말했던 것이 다시 떠오르면서요.



드랙퀸 지반을 처음 본 것은 드랙 아티스트와 LGBTQ+ 컬처를 소개하는 네온밀크 또는 성소수자의 일상을 다루는 김똘똘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였습니다. (어디가 먼저였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ㅎ)


최근 우리나라도 성소수자들이 다양한 활동을 펼치면서 관심과 이해도가 높아지고 있는데요. (물론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요.) 그들의 콘텐츠도 가리지 않고 즐기지만 부모 된 입장에서 가끔은 ‘만약…?’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웃음 이면의 것들이 보이면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게 되는 것이죠. 언제나 ‘모든 일이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살고자 하지만 성소수자를 자녀로 둔 여성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을 보면서도 경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이런 저의 복잡한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챈 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에 저는 지반의 한 인터뷰 영상에 가닿습니다. 여러 사람과 1:1 인터뷰 형식으로 대화를 나누며 드랙퀸, 드랙퀸 지반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상이었는데요. 지반은 딸을 둔 아빠인 중년 남성의 자장면집 사장님과도 마주합니다. 게이이기도 한 지반에게 사장님은 부모님께 커밍아웃 한 과정을 묻습니다. 정확히는 당시 부모님의 반응을요. 저는 여기서 들은 지반 어머니의 반응에 잠시 머리가 멍해집니다.



이토록 현명한 대답이라니. 정말로 어렵게 얘기를 꺼냈을 자녀의 정체성을 긍정하면서 자신의 힘듦과 어려움도 이야기하고 자녀의 용기를 칭찬하면서 앞으로 바라는 부분도 전하는 의연한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상상도 못 할 것 같은 대답이었죠.


그냥 나온 대답은 아닐 겁니다. 어머니의 말처럼 혼자 고군분투한 세월 동안 깎이고 깎여 나온 결정체 같은 말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자녀의 성 정체성을 일찍 알아채고 혼자 가슴앓이를 할지언정 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온 어머니라니. 지반이 드랙퀸으로서 당당히 대중 앞에서 활동할 수 있는 힘이 그곳에 있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유튜브 ‘대화의 장’ 채널 <만남의 광장> 지반 편 중 한 장면


무슨 거창한 얘길 하려고 티베트 노승에 드랙퀸까지 소환했냐 싶기도 하겠지만 대단한 얘길 하려는 건 아닙니다. 사실 제가 무슨 말을 더 하지 않아도 이미 많은 걸 충분히 느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아르갼의 헌신과는 거리가 먼 양육자입니다. 평생 좇아 할래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드랙퀸 지반의 어머니처럼 현명한 대답을 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밖에서는 똑똑한 척 다하지만 두 어린이와의 일상에서는 여전히 이성의 끈을 놓기도 하니까요.


그렇지만 믿음. 제가 두 사람을 관통해 얻은 가르침은 믿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고유한 존재라는 믿음, 서로 다른 고유한 존재일 때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요. 그러니까 린포체이든, 드랙퀸이든 그들의 정체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 말이죠. 그 믿음이 그들의 존중과 포용, 애정과 행복의 근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집 두 어린이의 티 없이 말간 눈, 해사한 웃음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어떤 인연으로 만났을까 궁금해집니다. 이런 귀한 존재들이 어떻게 제게 왔는지 감격스런 마음에서요. 너무 어렸을 땐 마냥 힘든 날도 많았지만, 점점 각자의 존재감을 뿜으며 불쑥불쑥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보니 내 역할은 이들이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떠날 때까지 믿고 기다리는 것이었구나 싶습니다.


오늘도 두 어린이와 수학 문제집을 사이에 두고 서로 한숨을 푹푹 쉬어대고 머리를 자르네 안 자르네 실랑이도 했습니다. 순간에는 티격태격하고 말았지만 나와 다른 존재라는 믿음으로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대화를 나눈 뒤 화해로 마무리했죠. 이런 날을 앞으로도 수천 번, 수만 번 반복할 것입니다. 노승의 고행과 드랙퀸 어머니의 외로운 가슴앓이에 비하면 별것 아니겠지만요. 그래도 이 여정의 끝에 제게도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두 어린이를 온전히 이해하고, 포용하고, 사랑할 힘이 길러지면 좋겠습니다.



written by 치즈




<다큐멘터리 & 인터뷰 영상 정주행하고 싶다면>


- 다큐멘터리 영화 <다시 태어나도 우리> 보기 | 네이버 시리즈온
(제발 꼭 봐주세요...!)

- 유튜브 ‘대화의 장’ 채널 <만남의 광장> 지반 편 보기
05:55 부모님은 뭐라시던가요?
14:22 당신의 가족이 성소수자라면?

+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 보기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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