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내일이 부디 안녕하기를.

by 투명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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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마감인 적성검사를 하러 떠나는 과장님에게 이미 대기번호 900번이 넘었으니 운이 좋아 적성검사를 마치게 되면 대박인 거고, 만약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안되면 운전면허는 다시 따야겠지만 잊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생긴 거라고 생각하라며,

“그니까 누굴 탓하겠어. 미루고 미룬 건 본인 이잖아요. 웃으며 라방켜서 사람들에게 내가 액땜 다했으니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해줘. ”라고 나는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할 때의 나는 몇 시간 뒤에 종로거리를 미친 애처럼 뛰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집에 와서 여유 있게 잠시 쉬었다가 서둘러 영화관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오늘 조기퇴근이 될 거라는 공지를 듣자마자 예매 창을 열어 "밀레니엄 맘보"를 예매했다.

어젯밤에 봤을 땐 전석 매진이었는데 역시 당일 취소되는 표가 생기는구나.

이대로 가면 40분 정도 여유 있게 도착할 테니 평화롭게 서울아트시네마의 마지막 상영작을 보면서 한 해를 마무리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버스기사님이 육성으로 공지를 하셨다. 오늘 보신각 타종 행사로 도로가 통제되므로 종로 3가까지 가고 우회한다는 안내였다.

얼레벌레 종로 3가에 내려보니 양쪽 지하철역이 모두 한참 걸어가야만 하는 위치에 있다.

그렇게 걸어서 지하철 역으로 들어갔다가 변수가 생기면 난감한 상황이다. 아무래도 시간 안에 못 갈 것만 같다. 게다가 지하철 역에서 영화관까지는 또 한참을 걸어야 하는 위치에 있다.

30분밖에 안 남은 시간에 잠시 고민하던 순간, 내가 러닝화를 신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나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아침에 출근할 때 요즘 너무 못 뛰는 거 같다고 … 실내 러닝을 할 수 있는 곳을 어서 찾아야겠다고.. 그 생각을 왜 했을까? 영하 7도에도 그냥 이렇게 패딩 입고 냅다 뛰면 되는걸…

후드를 뒤집어쓰고 장갑도 없어서 카디건 소매를 끌어당겨 워머처럼 꺼내 썼다.

레이어드 원피스가 다리에 감겼지만 상관없다.

나는 올해의 마지막 일정을 향해 달려간다.

몸은 땀이 났지만 얼굴은 점점 얼어갔다. 중간중간 건널목이 많아서 지체될 때마다 자꾸 시계를 봤다.

역시 남의 에피소드에 웃을 때가 아니다. 내 인생이나 잘살자.


정동길에 막 도착했을 때 영화 상영까지 9분이 남았다.

그냥 상영관에 들어가려다 다시 돌아 나와 편의점으로 뛰었다. 이대로 들어가면 갈증으로 중간에 집에 가고 싶어질 것 만 같다. 물 한 병을 겨우 사들고 상영관으로 들어가니 6시 58분이다. 2분 남기고 safe!!

그렇게 나는 올해의 마지막 영화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밀레니엄 맘보”를 보게 되었다.

먼 훗날 이날을 떠올리면 영화가 먼저 기억날까? 아니면 숨 가쁘게 뛰던 2025년 겨울밤의 내가 떠오를까?


내년엔 많이 안 행복해도 되니까 다소 적게 불행하고 무탈하게 보내고 싶다. 나를 포함한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건강하기를..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소원이 되어도 좋겠다.

새해 복 많이 받고 내년에 만나자는 나의 인사에 "그냥 … 내일 보는 거야."라고 대답하던 과장님처럼, 평범한 수많은 내일을 차곡차곡 모아

한 달을,

한 계절을 ,

또 한 해를 잘 보내보고 싶다.

모두의 내일이 부디 안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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