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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승 Jan 30. 2021

이렇게 될 줄 알았기 때문에

두 번째 이유

J

  얼마 전에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정주행을 완료했다. 응답하라 시리즈를 제작한 PD 답게 오래된 가요들이 극 중에 자주 등장했다. 그냥 배경 음악으로 나오는 것을 넘어서 내용에서도 큰 역할을 하곤 했다. 여자 주인공과 오랜 친구로 지내왔던 남자 주인공이 숨겨왔던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라는 오래전 내가 즐겨 듣던 노래가 나왔다. 그 장면과 가사에 너와의 첫 만남이 떠 올랐다.


 2015년 10월, 우리는 회사 연수원에서 처음 만났다. 너는 새로 산 휴대폰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우리 조에서 가장 어린 여자아이였다. 붙임성이 좋은 네 성격 덕에 우린 금방 친해졌다. 우리가 가까워질수록 과제를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네가 자꾸 눈에 들어왔고 다른 동료들을 배려하는 네 모습에서 네가 참 속이 깊은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야 말하지만 연수 기간 동안 나는 그때의 여자 친구와 전화로 수시로 싸웠다. 그럴 때마다 저 멀리서 다른 한 무더기의 남자들과 어울리고 있는 네가 괜스레 신경 쓰였다.


 연수원에서 지낸 기간 동안 우리는 총 세 번을 껴안게 되었다. 너는 기어코 그런 적이 없었다고 발뺌하곤 하지만 새벽 2시 반 전체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과제를 통과하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내게 달려들어 품에 폭 안기던 네 모습을 기억한다. 마지막 날 낙엽이 가득한 나무 아래서 서울로 가는 버스에 네 짐을 실어주고 나서 돌아가는 나를 와락 껴안았던 네 모습도, 그리고 그게 못내 아쉬워 너를 다시 껴안던 내 모습도 생생히 기억한다. 기억 안나는 척 해도 딱히 중요한 건 아니다.


 그때, 난 이미 결국 널 사랑하게 될 줄 알았던 것 같다.




S

  인생 첫 회사에 입사 후 배정되었던 팀은 그 당시에 회사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았던 팀이었다. 밥을 먹듯 야근을 했으며 주말도 없었다. 술을 좋아하는 팀장님 덕에 회식이 최소 주 2회는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사수를 만나게 되었다.(미운 정이 쌓여 지금은 절친이다) 밤늦게 선배들이 퇴근하고 회사 탕비실에서 숨죽여 울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수없이 해오던 나에게 연수원에서 2주 간의 교육 기간은 내 인생의 짧은 아타락시아 였다.
 
 빨리 취직한 것도 아니었는데 연수원에서 나는 막내였다. 내 왼쪽에는 2살 많은 털털한 서울 언니가, 내 오른쪽에는 덩치 크고 순박하게 생긴 공대 오빠가 앉아있었다. 반에서도 나이가 많은 축에 드는 그 오빠는 어린 풋내기들과 이 교육에 참여하는 것에 전혀 흥미 없는 표정이었다. 딱 여기까지가 덜도 말고 더도 말고 한 네 첫인상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밤새서 울며 통과하는 팀도 있다더라 하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악명 높은 과제의 표적이 우리 팀이 될 줄이야. 수차례 탈락을 먹었고 새벽 2시가 넘어서 시작된 마지막 시도에서 통과하는 순간 서러움에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 때마침 밖에 숨어있던 같은 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는 걸 보며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다. 마침 내 앞에 덩치 큰 공대 오빠가 내 쪽을 보고 있었고 무작정 달려가 안겨 울었다. 그 덩치 오빠는 마지막 날 내가 차에 짐 싣는 것을 굳이 도와주겠다고 했고 드라마 속에 나오는 서울 남자처럼 잘 가라고 꼭 껴안아주었다. 첫인상과는 달리 마음씨가 고운 오빠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와서 나는 같은 반 동기가 소개해준 회계사 친구와 사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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