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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승 Jan 31. 2021

해봐도 좋을 것 같아

시총 10위 대기업에서 외국계 스타트업으로 이직하기

 대리가 되던 해부터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나도 회사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과, 연 1회 지급되는 빵빵한 인센티브는 마약과 같은 것이었다. 더 이상 비정상적인 탑다운 형태의 의사결정 과정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인사발령과 승진 등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바텀업 형태로 직원들의 의사를 취합하겠다고 하면 혹시 위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될 판이었다.

 

 얼마 전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서 '대기업 10년, 중소기업 와서 느낀 점'이라는 제목의 글이 약 2,000개의 좋아요와 600여 개의 댓글이 달리며 주목을 끌었었다. '새회사'라는 회사명 아래서 꾸밈없이 덤덤하게 솔직하게 써 내려간 그분의 글과 많은 직장인들의 댓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마음속에서 뭔가 꿈틀꿈틀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또 한편으론 무모한 도전을 한 '새회사'님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번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대리가 된 이후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였다. 위에서 하지 말라고 하시네, 아무래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번 건은 상무님이  시기가 아니라고 하시네, 다음 기회를 기다려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팀장님께서 이 건은 회사의 정책과 반대된다고 하시네, 일단 시기를 기다려 보자.


다음은 없었다.



 첫 회사에서 대부분의 경력을 이커머스 세일즈 매니저로 보냈다. 내가 같이 일한 카운터 파트너사는 대부분 국내/외의 이커머스 플랫폼이었다. 그들은 옴니 채널 시대, 신유통 시대, 라이브 커머스 시대 등 다양한 네이밍으로 시시각각 진화했고 그 페이스에 맞추기 위해서 브랜드사 들은 항상 빠른 의사결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통적 제조업 회사에서, 기존의 정책과 조금이라도 다른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해선 '기획서 작성 - 직속 상사 구두 보고 - 부서장님 구두 보고 - 품의 상신 - (각종 유관부서의)부서장들의 재가'의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 최소 2-5일은 걸리는 이 과정을 기다린 우리에게 되돌아 오는 대답은십 중 구는 이번은 어렵겠다는 대답이었다.


 어쩌다 한 번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을 땐, 이미 발 빠른 의사 결정으로 치고 올라오는 신생 브랜드나, 상상도 못 할 광고비로 구좌를 사들이는 외국계 회사들에게 모든 기회를 뺏기고 나고서도 한참 후였다. 그럴 때면 위에선 왜 하라고 해도 못해오냐고 오히려 우리에게 되묻곤 했다.




 분하고 억울했다. 분명 잘될 거라는 확신이 있고 성과를 낼 수 있는데 위에선 시키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회사를 위하는 일이라고 하셨다. 그런 날이면 집에 돌아와 '해봐도 좋을 것 같아'라는 얘기를 해주는 회사로 이직하는 것을 꿈꾸며 스타트업과 외국계 전문 구직 사이트를 전전하곤 했다.


선배들은 그런 내게 정도의 차이일 뿐 회사라는 조직은 다 똑같다며 위로가 아닌 위로를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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