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될 건 없잖아요?”라는 말이 주는 파괴력
사랑의 기술을 쓴 에리히 프롬은 다른 작품인
<존재의 기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변덕이란 그 사람의 성품 전체와의 구조적 연관 없이, 그리고 그 자체의 목표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욕망을 말한다'
이런 변덕을 대표하는 문장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Why not?'이다.
할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안 할 이유가 없기에 한다.
안 될 것이 없다는 사실만이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에리히 프롬은 이 문장이야말로 무조건적인 반항과
변덕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Why not? 이 너무나 멋지게 살아남은 시대에 살아서
그런지 에리히 프롬의 이런 주장이 오히려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억에 남은 것이다.
그런데 요새 일을 하다 보면 Why not?의
가공할 만한 힘에 놀라곤 한다.
'안 될 건 없잖아?'
일에 대해 얘기하다가, 불만을 듣다가 이런 문장을
마주하게 되면 아득해진다. 필요성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훨씬 비용이 낮은데 파워는 강력하다.
그러나 듣는 쪽에서는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아찔하기만 하다.
물론 Why not? 은 맥락은 봐야 한다. 분명 고루한
관습, 전통을 깨는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을 것이다.
뭐든 No!이라고 하는 사회에서야 '왜?'를
물을 수 있는 것이 건강의 척도였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한계, 제약, 규제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창조되고 사라지고 또 3초 만에 창조되는 사회에서
Why not은?
너무나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다원화된 사회에서 Why not은?
예상치 못한 파괴력을 갖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자원을 끌어당기든, 사람을 때려박든,
엄청난 기술을 이용하든 끊임이 없을 수 있는 사회로
이동하고 있다. 아주 짧은 3초짜리 쇼츠라고 할지라도
어쨌든 우리는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카메라를 갖고 있어야 하고 TV에 비출 권리가 있어야
하는 과거와는 어찌 되었든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
당연히 안 될 것 없다. 못할 이유가 없다면 말이다.
게다가 Why not? 은 금지된 것이 많았을 시기에는
무척 좋은 무기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해야 할
것이 폭발적으로 생겨나는 시기이다.
눈만 살짝 돌리면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또 사라지고를
반복한다.
모두가 모두에게 이것을 하자고 말한다.
이런 혼란한 시기에는 오히려 '왜?'라는
문장을 더욱 찾게 된다.
제가요? 이걸요? 왜요?라는 외침은 MZ가 버릇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뭐든지, 언제든, 끊이지
않고 만들어낼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안 할 이유는 없잖아?’라는 말은 가볍게 들리지만,
실은 우리를 불필요한 소모와 피로로 향하게 만드는
위험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Why not?, We can do it!
할 수 있다는 말 앞에서 왜 해야 하는가 라는 말은 소위
'진지충' 같아 보인다.
냉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너 T발 C니?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래야만 하는가라는 문장을 말하는 사람은
두 부류일 것이다. 정말 냉소적인 사람과 정말로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덮어놓고 거부한다기보다는 '적절성'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은 것이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그것이 왜 필요한지, 어디까지
되어야 하는 것인지,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다음 편에서
이 글에 영향을 준 책을 소개한다.
인용을 직접 하는 경우도 있지만 책 내용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인용은 인용문구로, 설명하는 경우 직접 인용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무조건적인 반권위성, 도저히 조용히 없을 수 없는
분주함 등. 우리 시대에는 너무나 당연한 폐해들을
일찌감치 예측한 명저. 이 책은 동작가의 다른 작품에
비해 개인 차원에서 갖춰야 할 태도 측면에 초점을
맞춰서 얘기하는 편이다.
규율, 침입으로부터의 방어, 멸균 같은 단어들이 근대를
이뤘다면 이제는 끊임없는 성과사회가 되었다.
규율은 규율을 강제하는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거기에 저항할 수 있기도 했다.
성과사회에서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강제는 다름
아닌 내면에 있다. 그렇기에 저항할 대상은 없고
그저 피로하기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