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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르찌르 Dec 31. 2018

8.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여기자들이 모였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친구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예비 신랑과의 첫 만남부터 결혼까지, 이런 자리에서 흔히 나오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한참을 웃고 떠들던 그날의 주인공이 머뭇대며 예비 신랑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결혼 준비 내내 시댁의 간섭이 심했다고 했다. 특히 신혼집을 마련할 때는 의견차가 커져서 예비 신랑에게 중재를 부탁했다.(사실 말이 중재이지, 시부모의 뜻을 반박하고 내편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비 신랑이 시부모에게 강하게 맞서지 못하고 중간에서 난감해한다는 이야기였다.

 

지금부터 이런데, 제가 앞으로 이 사람을 믿고 살 수 있을까요?


주인공의 물음에 '예비 신랑이 원래 그렇게 우유부단하냐', '결혼 초반에 내 편으로 만들어놔야 편하다' 등 동조와 조언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때 결혼 10년 차 고참 선배의 한마디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던 기억이 있다. 


"오히려 예비 신랑이 자기 부모한테 강하게 맞섰다고 하면 더 걱정됐을 것 같아. 자기 부모를 막 대하는 사람은 결국 너한테도 막 할 수 있는 사람인 거야. 강하게 소리 못 지르고 말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이 배려 깊다는 것이지. 지금이야 둘이 죽고 못 사니까 그럴 일이 없다고 쳐도 앞으로는 서로 얼굴 붉히고 감정 상할 일이 많을 거야. 그때도 그 사람은 적어도 너를 막 대하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지."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대표적으로 사랑이 그렇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수많은 감정의 파도를 겪고 나야 알 수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과 사랑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결혼 적령기를 맞은 내게 가장 후회되는 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20대에 연애를 많이 해보지 못한 것이다. 느지막이 연애를 하면서 내 감정은 풍요로워졌다. 마주 앉아 눈을 맞추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이 단절된 듯했고, 고요했던 내 세상에 새로운 세상이 밀려오며 일상이 새로워졌다. 또 나를 토닥토닥해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힘든 일상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됐다. 물론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싸우고 화해하고 헤어지면서 극한 감정의 파도를 경험했다. 마음에 생채기가 났다가 아무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과 타협할 수 없는 일을 알게 됐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내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도 배웠다. 20대에도 이런 감정의 파도에 뛰어들었다면, 나의 일상은 더욱 찬란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옆자리를 지켜줄 사람을 맞이할 때, 결혼 10년 차 선배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보다는 더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겪어봐야 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마음껏 사랑해봐야 삶의 감정이 풍요로워지고, 성숙해질 수 있다. 그리고 온전히 경험해봐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떤 사람과 사랑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비용과 편익을 따지는 '관계의 가심비'로는 얻을 수 없는 값진 결과물이다. 


행복하려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려면 내가 누구인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관계의 가심비는 관계를 단절시키고 시선을 지금의 나에게로 돌린다. 사실 스스로에 대한 파악은 혼자서 할 수 없다. 나와는 다른 누군가를 맞이할 때, 그 다름을 통해 스스로를 들여다볼 수 있다. 지금의 20대가 관계의 가심비를 통해 추구하는 건 행복이 아니라, 편안함이다.

 

내가 족히 열 번은 넘게 봤을 드라마 <연애시대>에 이런 말이 나온다. 

"지금은 잃어버린 꿈, 호기심, 미래에 대한 희망. 언제부터 장래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게 된 걸까.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1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뎌낼 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며 가슴 설레게 하는 것.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이다."


삼포세대, 오포세대, 칠포세대, N포세대에 공통적으로 담겨 있는 포기 리스트는 연애와 결혼, 출산이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연애와 결혼, 출산은 대개 사랑에서 출발한다. 침체된 경제 탓에, 취업이 어려워서 사랑부터 포기한다면 어른들은 어떤 장래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까. 하루를 견뎌내는 삶은 너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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