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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르찌르 Dec 31. 2018

9.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던 고성장의 시기에는 성장의 규모만큼 기회가 많았다. 시장에 돈이 풀리니 기업들은 투자를 늘렸고, 고용이 확대됐다. 은행의 고금리와 금융자산의 가치 성장은 서민들의 쌈짓돈을 종잣돈으로 만들어줬다. 내일은 더 성장할 것이란 기대에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20대는 이런 호황기를 누리지 못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기 침체기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저성장 기조가 계속되면서 성장과 기회에 대한 희망이 사그라들었다. 그래서 20대에게는 내일 더 나아질 것이란 기대가 없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지금'에 집중하도록 이끌었다. 이들은 지금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소비하고 인간관계를 축소시킨다. 지금의 20대가 스스로를 '가장 불행한 세대'라고 부르는 이유다.


20대는 불행의 탓을 돌릴 데가 필요했다. 그 대상은 고성장 시기를 누리며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차지한 50대였다. 높아지는 취업 문턱과 얇은 지갑, 미래에 대한 불안 등 지금의 불행에 대한 책임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50대, 우리 부모를 향했다. 부모를 향한 탓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흙수저니 금수저니 하는 '수저계급론'이다.



온라인 대형 커뮤니티에서는 '흙수저의 일상', '금수저 저녁밥상' 등이 인기 게시물로 올라온다. 20대 사용자 비율이 높은 소셜미디어 인스타그램에서는 수저계급 인증샷이 현재 8만건 넘게 게시돼 있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지난 10월 발표한 설문조사에서는 수저계급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90%가 "씁쓸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이 중 65%는 자신이 흙수저에 가깝다고 말했다. 


수저계급론은 계급이 대대손손 세습되듯 경제적인 상황도 부모로부터 대물림된다는 의미이다. 설문에서 90%가 수저계급론이 현실이라고 말한 것은 '부모의 경제적 상황이 지금 자신의 상황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 10명 중 6명이 흙수저라고 밝힌 이면에는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부족해 자신이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20대는 가엾다. 밀레니얼 첫째인 30대도 같은 시대를 경험했지만, 둘째인 20대는 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신꼰대들 입에서도 "예전에 입사했기에 망정이지, 지금 이 회사에 지원했으면 떨어졌을 거야", "내가 저렇게 스펙이 높았으면 쥐꼬리만한 월급 받고 안 다녔을 텐데", "요즘 애들은 뭐든 빡세다" 등의 말이 나온다. 굳이 꼰밍아웃하며 20대에게 잔소리를 시작하게 된 배경에도 이런 둘째들에 대한 연민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바로잡아야 할 사실이 있다. 지금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세대는 20대가 아니라 50대, 우리 부모다. 고성장을 누린 세대이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3년 카드대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0년 유럽발 재정위기 등 경제가 고꾸라질 때마다 버티며 가정을 지켜온 이들이다. 50대는 직장에서는 임원과 신입직원 사이에 끼어있고 집에서는 70대 부모와 20~30대 자녀 사이에 끼어있는, 말 그대로 '낀 세대'다. 낀 세대는 고용환경이 악화되면서 정리해고의 주요 대상이 됐다. 또 성인이 돼서도 독립하지 못한 자녀를 뒷바라지하는 동시에 고령사회에서 들어선 70~80대 부모를 부양한다. 집안에서의 부담은 점점 커지는데 직장에서는 내쫓길 위기에 처해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분기 50대의 가계부채는 425조원으로 6년 사이 152조원이 늘었다. 또 신한은행이 공개한 '2019 보통사람 금융생활 보고서'에 의하면 경제활동을 하는 50대 10명 중 1명 이상은 3년 내에 은퇴할 예정이지만, 절반이 특별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인 앞날에 대한 대비도 못한 채 가계 부담을 떠안고 있는 셈이다. 우리 부모는 장기화된 경기 침체기를 버티며 또다시 가정을 지키고 있다. 이들을 탓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20대들은 관계에서도 비용과 편익을 따진다. 이 '관계의 가심비'가 수저계급론처럼 그들의 부모를 향하는 경우를 더러 목격한다. 지금 당장 편하게 탓을 돌릴 수 있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부모는 가심비를 따지지 않고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이들에게 관계의 가심비로 또 다른 불행을 안기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지금 이 말에 반박할 수 없는 20대는 따뜻한 부모를 둔 진정한 금수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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