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없을 땐 이해할 수 없었던 껄쩍지근한 답변들을 꺼내보며
일찍 아기가 생겼던 친구에게 물어봤었다. "아기가 있으면 왜 좋아?" 하고싶은 걸 못하게 되고 희생하는게 힘들거라는 단정이 내심 깔려있었는데 그 친구가 그랬다.
강아지도 예쁜데 아가는 너~~~~~~~~~무예뻐. 이건 낳아봐야 알아
강아지를 안좋아하는 나는 강아지보다 예쁜 아가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예쁜 걸 기르는 행위가 좋은 걸까 의구심이 들면서도 다시 궁금했다. 아기가 생기면 어떤 기분일까. 좋아하던 웹툰의 한 컷에서는 아기가 생기면 세상이 무지개빛으로 보인다고 표현했다. 그 무지개빛은 다채롭다는 걸까 사랑의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감정인걸까 도통 알 수가 없다. 선배 엄마들의 대답에 속 시원했던 적이 없었다. 아기 때문에 웃는 다는 말이 내 삶을 포기하는 데에 대한 보상 심리 아닐까 미심쩍기도 하고, (본인이 아닌)아기를 통해서 웃는다는 그 문장 속의 희생정신이 갑갑하기도 했다.
그리고 돌쟁이 쌍둥이 키우기 1년차, 겪어보니 그 모호한 답변의 정체를 알겠다. 온몸이 안아픈데가 없고 정신적으로도 몹시 지쳐있음에도 아기가 날 보고 웃으면 좋다. 내가 없으면 밥도 못먹고 대소변도 못가리는, 내가 안아줘야만 움직일 수 있는 나를 온전히 의지하는 저 약한 존재가 좋다. 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눈만 마주치면 한없이 방긋웃으며 팔다리에 힘이 생기자 마자 나에게 와락 안기던 아가가 좋다. 고난의 육아 속 아이의 신뢰를 온몸으로 느끼던 그 순간, 내가 이 아이를 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며 나만이 할 수 있는 임무를 장착하게 된다.
내가 하던 것들을 포기하고 아이에게 집중하면, 내가 빛날 기회와 빛나고 싶은 욕구는 없어질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나의 아이가 되었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아이가 나를 볼 때마다 하게 되었다.
경력은 멈췄지만 아기를 키우며 배우게 된 것이 많다. 마음대로 안되는 아가를 보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말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지 않게 되었다. 길가에서 급히 기저귀가 필요해 동동 구를 때는 같은 아기 엄마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동시에 급히 동동 구르는 다른 아가 엄마의 표정을 보고 "뭐 도와줄까요?" 라고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전자렌지가 없는 식당도 아기 이유식을 데우기 위해 주방의 화구를 하나 내어 중탕을 시켜준다. 설사 불친절하다고 소문난 식당이라고 해도. 엘레베이터 안 서로에게 관심없어 보이는 낯선 사람들도 아기를 보면 사르르 눈웃음을 지어 이웃과 인사를 나눈다.
이웃과 인사만 해도 아이 앞에서 나는 기특해지고, 유모차를 밀며 투표장에만 가도 기특한 부모가 되었다. 무단횡단을 하고 싶은 충동 앞에서도 유모차 안에서 잠든 아이를 보고 빙 돌아가며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물학적인 성인 말고 진짜 어른 말이다. (무단횡단 안한다고 뿌듯해하는 '성숙한'어른은 없을 것 같아서 '성숙한'은 썼다 지웠다.)
머리로 알던 것은 많았는데 아이가 생긴 뒤에야 속에 들어왔다. 아가는 나에게 가장 큰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