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교사가 혁신학교에 발령났다.
전보시즌이 되면 어느 학교로 발령이 날 것인지 곤두선다. 전보를 앞둔 친구가 혁신학교를 피하기 위해 출퇴근도로를 고민해 원서를 작성하는 것을 보았다. 한번쯤 혁신학교에 근무해보고 싶었던 나는 왜 그렇게 하냐며 물었더니 선생님들 간 분위기가 좋지 않아 말이 많단다. 동료와 관계가 좋지 않으면 힘든 건 사실이라 깊게 물어보진 않았는데, 1년 후 내가 혁신학교에 발령이 났고 듣던 대로 쉽지는 않다.
혁신학교로 발령이 났다고 하면 "힘들겠다~"라는 말 부터 들었다. 이 힘듦은 두가지로 나뉜다. 먼저, 초창기 혁신학교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퇴근 못하겠네~ 일이 많겠다."라고 얘기했다. 혁신학교 특유의 교육과정과 행사가 많아서 퇴근이 어렵다는 것이다. 한번쯤 몰입해서 일벌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설마요~" 하면서도 기대했다. 가장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는 10년차 교사 아닌가 - 어차피 평생 교사로 산다면 특별한 경험을 해보고 싶은 패기가 있었다. 1년전의 나는.
하지만, 일이 많다는 것은 나의 기대와는 달랐다. 학급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새로운 행사를 기획하기 위해 일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것과는 좀 다르다. 보통의 학교에서 10만큼 해내기 위해 10의 에너지를 썼다면, 지금은 10만큼 해내기 위해 20의 에너지를 써야한다. 매년 0에서 시작하는 영교육과정이니까.
영교육과정이 무슨 소리이냐,
단지 작년 자료를 쓸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매년 처음부터 정한다. 어떤 교육을 지향하는지 비전부터 설정하고 목표를 정하며, 교육과정을 재구성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발생하고 교사마다 교육비전과 그 방법이 다르다는데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아이를 빛나게 하는 걸 교육의 최종 목표라고 설정했다고 해보자. 나는 모든 아이는 잘 할 수 있는 영역이 있기 때문에 아이가 뽐낼 수 있는 분야를 최대한 다양하게 만들어서 모든 아이가 빛날 수 있게 해주자는 입장이다. 하지만, 어떤 선생님은 모든 아이가 모두 소중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빛나게 할 자리를 따로 만들지 말자고 주장할 수 있다. 목표는 같지만 접근방식이 완전히 상반되는거다. 보통의 학교에서는 선생님간의 교육방식 차이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교육청에서 제시한 교육비전은 정말이지 큰 덩어리라 해당 줄기에 맞추어 각 학급에서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아이들은 1년마다 한번씩 선생님이 바뀌기 때문에 이런 교육관도 경험하고 저런 교육관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나의 혁신학교에서는 학년 내 통일된 영교육과정이기 때문에 교육관을 통일해 성취기준을 재구성하길 요구했다. 정답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논의를 오래한다고 해서 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논의에 지쳐 목소리 큰 사람의 의견대로 결론이 날 확률이 높다. 상반된 의견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결론이 나면, 너는 너대로 해라 나는 나대로 할란다가 된다. 모든 선생님들은 각자의 교육관에 따라 학급을 운영해왔기 때문에 그렇다. 교육관은 가치관과 같아서 이걸 통일하는 건 남북통일만큼이나 어렵지 않을까 하는데, 계속 이렇게 해왔다고 한다. 놀랍다.
우리 학년은 좋은 말을 붙여 교육비전을 문장으로 만들고, 교과 간 비슷한 주제를 같은 시기에 모아 통합운영하며 특색활동과 함께 교육과정을 재구성했다. 교육과정 재구성을 할 때도 학년간 논의해야 하는 것이 많은데, 모든 걸 "알아서 논의하라~"는 기조 덕에 무엇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영교육과정이라 할지라도 혁신학교가 전통적으로 해오던 행사들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교육비전과 교육과정 재구성의 범위가 크게 자유롭지 않았다. 마치 답은 다 정해져 있었지만, 그 전에 너희끼리 의논해봐라 하는 답정너의 느낌이랄까. 다행히 선생님들 간 자료 공유도 원활히 이루어졌고 학부모에게 만족도가 높다는 피드백을 받았으며 학급 운영의 질도 높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보통의 학교보다 혁신적이었고 더 잘했는가는 의문이다. 나의 수업의 질과 학급운영은 똑같이 10인데, 여기에 들어가는 에너지만 20으로 늘어난 기분이었으니. 주변 분들의 말대로 혁신학교는 힘들었다.
혁신학교가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두번째 이유는 선생님들간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거였다. 다같이 힘 합쳐서 수업 잘 해보자고 하는 학교가 왜 힘들어? 라며 몰랐는데, 모두 자신의 색이 뚜렷할 때 의견 통일을 해야만 하면 힘들어진다.
1학기 교육과정 재구성을 해보고 나니 이렇게 하면 좀 더 일이 수월하겠다 싶어 여름방학을 앞두고 업무지원팀에 한 가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지금까지 그런걸 요청한 분은 아무도 없었어요. 선생님이 방식을 우리학교에 맞게 바꾸셔야 하지 않을까요?"였다. 아뿔싸. 내가 이전 학교의 방식을 고집하고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으로 보였나 싶어 바로 정중하게 사과하고 기존 방식을 몰라 1학기에 힘들었던 것 같다, 알려주면 그 방식대로 해보겠다 라고 말했다. 전보발령 온 선생님들이 기존 학교에 대해 불만을 말하는 것이 좋아보이지 않았기에 사과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기존 방식에 대한 안내는 결국 듣지 못했다. 물어 물어 알아보니 매년 처음부터 교육과정을 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기존방식이라는게 있을 것이 없는 것이다. "선생님 방식대로 재구성 하심 돼요~" 라고 답변을 들었지만, 내 방식대로 재구성을 하기 위한 딱 한가지 요청을 거절당하고 나니 아무 의욕이 사라졌다. 1학기 처럼 손으로 하나씩 헤아리거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기존 혁신학교의 방식대로 교과서를 버리고 새로 교육과정을 만들거나 둘중 하나만 가능했다. 이곳에서는.
그 뒤로도 몇 주간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선생님이 우리학교에 맞게 바꾸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나는 자꾸 뾰족해진다. 새 학교에 적응할 생각은 안하고 불만만 제기하는 무능력한 사람이 된 기분이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봐야지 했던 의욕이 사라지는 건 물론, 학교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졌다. 작년에 혁신학교로 발령받은 동학년 선생님이 "여기는 나를 적폐교사처럼 취급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열심히 해봤자 이방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잘 맞는 선생님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일터에서 가치관이 맞고 안맞고를 따져야 한다는 건 참 피곤한 일이다.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이 인정되는 혁신학교에서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나와 맞는 사람과 안맞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는 고작 혁신학교에 반년 머물렀을 뿐이다. 나의 교육관이 주류가 되게 목소리를 키우면 이곳에서 내가 꿈꾸던 교육을 할 수 있을까. 오년 후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할 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