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의 걸음걸이

영화 <화양연화>

by 장현석

글 장현석, 그림 이지호



생각 사에 봄 춘. 봄에 새 생명이 움트듯 사춘기 청년에게도 전에 없던 마음이 꽃봉오리 입벌리며 터진다. 이른바 열병의 계절이다. 새로 난 청춘은 설익은 충동으로 가득하고 이들의 로맨스는 대책 없이 펄떡인다. 너를 좋아해, 내겐 오직 너뿐이야. 줄리엣에 빠진 로미오는 앞뒤 제쳐두고 그녀를 향해 내달린다. 봄의 연애는 완급조절과 어울리지 않는 전력질주다.


꽃이 피고 지는 사이 여름이 온다. 운 좋은 이들은 봄의 뜀박질이 필요 이상의 괴로움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덕분에 여름의 로맨스는 무턱대고 달리지 않는다. 그중 현명한 몇은 스스로에게 맞는 걸음걸이를 알아갈지도 모른다. 시내 한복판에서 좋아한다고 소리 지르고, 만나줄 때까지 대문 앞에서 무릎 꿇겠다는 청춘은 옛일이다. 달라진 계절만큼 돌이킬 수 없는 아련함은 어쩔 수 없지만.


장마가 끝나가는 늦여름, 한 쌍의 남녀가 각자 배우자의 외도 사실을 눈치챈다. 이들은 젖어들듯 서로에게 이끌리지만 계절처럼 결코 내달리지 않는다. 다만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간다. 늘어질 대로 늘어지던 늦여름의 걸음걸이는 서로의 옆자리를 그대로 두기로 결심하고 이내 멈춘다. 남은 건 돌이킬 수 없는 때를 떠올리는 이들뿐이다. 무심한 가을이 오고 있다.



화양연화.jpg <花樣年華, 이지호 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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