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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현석 Feb 26. 2023

#15 자욱하다

재즈를 위한 형용사 사전 

Jim Hall 짐 홀

<Concierto>


자욱-하다 「형용사」 연기나 안개 따위가 잔뜩 끼어 흐릿하다.



오래전 토요일 밤이면 온 가족이 TV 앞에 모였다. 토요명화라는 명작 외화를 틀어주는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서였다. 관악기와 현악기가 어우러진 오프닝 시그널이 따라란, 하고 흘러나오면 매주 조금씩 다른 설렘으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시절의 일부가 되어준 곡명이 <Aranjuez Mon Amour>이며, 아랑후에즈 협주곡(Concierto de Aranjuez)의 편곡본이라는 사실은 한참 지나 알았다. 이젠 돌아갈 수 없는 때로 짧은 추억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노래다. 



어쩌면 짐 홀의 <Concierto de Aranjuez>가 다시 한번 멀리 데려갈 것이다. 무려 19분짜리 대곡인데 돈 세베스키의 미니멀한 편곡과 짐 홀 섹스텟의 서정적이고 담백한 연주 덕분에 부담스럽긴커녕 고즈넉하다. 특히 짐 홀의 소란 피우지 않는 기타 연주는 작은 소리까지 귀 기울이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다. 앞서 마일스 데이비스와 길 에반스가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한 동명의 <Concierto de Aranjuez>와 비교해 절제된 애수와 일종의 인내가 담겨있다. 둘 다 스페인으로 향하지만 마일스 데이비스 일행은 말을 타고 가고 짐 홀 일행은 순례자처럼 걸어가는 느낌이랄까. 



1975년작 앨범 <Concierto>는 빠르게 칠한 덕분에 형태가 다소 흐릿하지만 강렬한 색이 시각을 일깨우는 모네의 풍경화를 닮았다. 1번 트랙 <You’d Be So Nice to Come Home To>에서 짐 홀의 오랜 동반자인 알토 색소포니스트 폴 데스몬드와 베이시스트 론 카터뿐 아니라, 트럼펫의 쳇 베이커까지의 채색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파토스를 이룩한다. 묘사적이지 않고 감각적인 여섯 재료로 완성한 한 폭의 그림이다.



푸른 색조에 절여진 앨범 커버 이미지는 아즈텍이나 마야 문명 조각상이 아닐까 싶은데, 무엇이 되었든 과거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게 한다. 기억은 구체적으로 재현할 수 없지만 인상은 적당히 윤색되어 또렷하게 남는다. 오늘의 아랑후에즈 협주곡이 그러하듯, 오랜 시간 지나 앨범 <Concierto>를 찾을 때 지금을 떠올리는 재미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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