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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urger kim Apr 21. 2023

이별의 달인 <마라케시>

이방인의 시각



새벽 4시 30분,


페즈(fez)의 어느 싸구려 6인실 도미트리에서 요란한 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침 6시 마라케시행 기차를 타야 했기 때문에 알람 소리를 듣자마자 이불 위에 가지런히 벗어놓은 바지를 입고 화장실로 향했다.


주변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양치질을 하고 머리에 물만 묻히고 나왔다.

핸드폰 플래시를 이용하여 널브러져 있던 짐들을 배낭에 담았다.


배낭 지퍼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소리 때문인지

옆에서 자던 아르헨티나 털보 친구가 깼다.

그는 반쯤 잠긴 눈으로

당도 높기로 유명한 모로코 오렌지를

내 주머니에 몇 개 챙겨주고 다시 잠이 들었다.

대충 인사하고 오렌지를 입에 문 상태로 계단을 내려와

키를 반납하고 밖으로 나갔다.




새벽 5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고요한 정적과 함께 어둠만이 나를 반겨주었다.

내 발걸음 소리와 귀뚜라미 소리만 존재하는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차 한 대 지나다니지 않는 어두운 도로를 걸으면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기차를 놓치면 어쩌지?

누가 뒤에서 벽돌로 내 머리를 내려치면 어떡하지?

라는 쓸데없는 망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을 때,

클락션 소리와 함께 낡은 택시가 내 앞에 섰다.  




5시 25분쯤 기차역에 도착했으며,

생각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기차역에 퍼진 시골의 모기향과 같은 냄새를 맡으며

이제 막 오픈을 준비하는 샌드위치 가게에 들어갔다.


청소하는 직원들 사이에서

에멘탈치즈가 들어간 토스트와 각설탕 4개를 넣은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배를 채웠다.




6시, 기차에 올라탔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페즈의 중고시장에서 구입한 겉멋용 헤밍웨이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물론 읽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는

남들에게 보이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다.

여행을 다니면서는 나답게 행동하고

눈치 보지 말자던 다짐은

또다시 겉멋과 낭만에 사로잡혀

읽지도 않은 책을 괜스레 무릎에 올려놓아

고독한 연기와 동시에 몰래 하품을 하며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기차 속,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창문에 고개를 기댄 상태에서

이어폰 속에서 들려오는

이문세의 서글픈 목소리를 들으며

일출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

나름 비련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한 3~4번 자다 깼을까, 밝은 햇살과 함께 마라케시 기차역에 도착했다.




부서질 거 같은 허리와 배고픈 배를 붙잡고 기차를 빠져나왔다.


나는 역 안에 위치한 맥도날드의 간판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매장 안으로 들어가 빅맥을 2개 시켰다.


나는 발자취를 남긴 모든 도시에서 빅맥을 먹어봤지만,

신기하게도 오묘하게 맛이 다 달랐다.

참고로 마라케시에서 먹은 빅맥은

인도에서 먹은 마살라 향 가득한 빅맥 다음으로 맛이 없었다.


아무튼 입에 케첩을 묻힌 상태로 거리에 나와

메디나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신나는 중동노래메들리를 들으면서

생각보다 부드러운 도로 위를 달렸다.




온통 황갈색의 건물들,

길거리를 배회하는

어두운 베이지 계열의 우울한 당나귀들과

낮은 채도의 배경 속에서

화려한 색감의 의상을 입고 있는 현지인들의

모순적인 모습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숙소 앞에 도착했다.




마라케시의 메디나는 거대했다.


길거리에는 목줄을 찬 원숭이들,

곰장어가 오버랩되어

집에 돌아가고 싶게 만들었던 공연 중인 뱀들,

살아 숨 쉬는듯한 색감의 옷을 입고 있던 현지인들,

그리고 호기심 많은 4살짜리 아기들처럼

똘망 똘망 주위를 둘러보는 외국인들이

마라케시의 이미지를 굳히고 있었다.




햇빛 쨍쨍한 대낮에 골목을 거닐다

코를 찌르는 듯한 아로마향에 현혹되어

어느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히잡으로 가린 여자 판매원이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내가 그 판매원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것은

물렁한 토마토를 한 대 맞은듯한 눈 화장,

오래된 루비의 모습과 흡사하며 싸구려 적색을 띠던 손톱,

그리고 공항 면세점 향수 코너를 지날 때나 맡아본 듯한 인위적이지만 달콤한 향수 냄새였다.


평소 걸뱅이처럼 다니며

절약정신으로 무장했던 나의 관념은

그녀의 향과 분위기에 압도되어 산산조각 났으며

쓸모없는 고체 향수와 약초들이 들어 있는 투명한 비닐봉지를 손에 쥔 채 가게를 나오는 내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광장을 걷던 도중,

스위스 취리히에서 온 배낭여행자들을 만나 같이 동행하게 되었다.

운 좋게 그들과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주제를 갖고 따분하지만

가치 있는 이야기를 하며 마라케시의 밤을 보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며 웃고 떠드는 건 좋았지만,

내일이면 각자의 길을 걷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 슬펐다.


여행을 다니면서 한 가지 크게 바뀐 점이 있다.

바로 '끝맺음'이다.

나는 타인과 10분 이상 대화를 하면

자연스럽게 정을 주는 습관이 있었다.

이 습관은 인간적이지만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한다.


중학교 친구들은 고등학교에 가면서 이별하고

고등학교 친구들은 대학교에 가며 이별하고

훈련소에서 만난 동기들은 자대가 나뉘면서 이별하고

직장에서 친해진 동료들은 이직을 하며 이별하며

동고동락하던 친구와는 서로 바빠지면서 이별하게 된다.


정이 많던 나에게는

예견된 모든 이별의 접점들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여행을 다니면서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다 보니

해탈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현재의 관계에 최선을 다하여 집중하고

쿨하게 이별하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이 배움은

지금까지도 내가 낯선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못 여는 모순적인 계기가 되어버렸다.


어쨌든 나는 지금 수많은 이별과 만남에 있어서

뜨거운 불판의 삼겹살처럼 익어가고 있다.




짧은 축제의 막이 내리고

전등이 나간 화장실에서 3분 만에 씻고,

침대에 들어온 거리의 불청객과 놀아주다가

이불로 얼굴을 덮은 채 침대에 누웠다.

  



이불 밖에서는 다른 무리들의 대화가 한창이었다.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들렸던 불어와 아랍어는

갑자기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편안한 몸과 긴장된 정신은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으며,

또다시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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