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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돌 Sep 26. 2023

"도적: 칼의 소리" 리뷰

[스포일러 주의] 스튜디오드래곤, 언제까지 이럴 건데...

넷플릭스에서 "도적:칼의 소리"를 보았다. 스튜디오드래곤이 기획사로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기대가 컸지만 기대만큼 만족도가 크지는 않았다. 


평범한 서사에 어디서 본 듯한 클리셰. 일제강점기 간도라는 매력적인 시간과 공간의 장점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느낌이다.


일본군과 중국 마적단에 맞서는 간도의 조선인 이야기. 이 상황과 설정에 충실한 이야기였으면 오히려 더 매력적이고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아쉬움이 크다.


독립군이 등장하고 조선독립이라는 대의를 내세우면서 "가족을 지켜야 한다"라는 동포애까지 주제로 끌어안는 바람에 일제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스토리라인으로 한계가 정해져 버렸다. 국뽕과 PC주의가 시청률에 플러스가 된다는 굳건한 믿음은 도대체 언제까지...


노비출신이었으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갔다가 미국 군이 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의 선하고 이쁘기까지 한 정의로운 독립군(김태리 扮)을 돕는다는 설정. 미스터 선샤인의 유진 초이 (이병헌 扮)


노비출신이었으나 갑오경장으로 신분이 해방되어 일본군으로 복무하다 양심의 가책으로 간도로 가고, 거기서 핍박받는 조선 이주민을 돕고 이쁘고 정의로운 독립군(서현 扮)도 돕는다는 설정. 도적의 이윤 (김남길 扮)


스튜디오드래곤이 능숙하게 잘 변주하는 세계관이다. 제국주의 일본과 친일파 같은 거악을 선량하고 애국적인 민초들이 힘을 합쳐서 영웅적으로 응징한다는 서사.


간악한 제국주의 일본과 친일파. 사악하고 폭력적인 중국 마적단. 거기에 맞서는 선하고 정의로운 조선인. 교훈적이고 애국적이긴 하지만 드라마로서는 너무 익숙한 설정이고 식상한 서사다.




간도에서 터줏대감으로 살아온 중국인들과 중국 마적들도 자신들의 터전을 위협하는 일본군과 밀려오는 조선족들에 맞서야 하지 않았을까?


군국주의 일본의 명령으로 간도로 파병된 일본군과 일본순사들도 일본 제국주의의 명령을 수행하는 꼭두각시로서 시대의 희생양인 측면은 없었을까? 일본군은 일말의 양심도 회환도 없는 악랄한 살인기계들 뿐이었을까?


일본군과 중국 마적단. 간도에서 어쨌든 살아남아야 하는 조선 이주민. 


서로 죽고 죽여야 하는 시대적 비극 속에서 치열하게 전투와 전쟁을 치르는 그런 현실적인 서사가 오히려 더 드라마틱하지 않을까? 너무 다큐스러울까.




드라마 속 일본군과 중국 마적단은 엎치락뒤치락 하긴 하지만 결국엔 조선인 도적들의 총과 칼, 화살에 우수수 나가떨어지는 엑스트라일 뿐이다. 정의는 승리한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에 미국에서 제작된 전쟁영화에서 독일 나치나 일본군은 항상 잔인하고 사악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지금은 그런 류의 영화가 거의 제작되지 않는다. 미국인 스스로도 그런 만화 같은 설정이 민망하기 때문이다. 그게 교양이고 역사적 상식이고 인간 존재에 대한 배려이다.


100년이 더 지난 1920년대 이야기를 하면서도 우린 여전히 사악한 일본과 핍박받는 선량한 한민족. 정의롭고 강건한 독립군 같은 설정과 서사를 반복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부족한 역사 인식을 비난하지만 이런 의 영화를 만들어서 그들을 사악하고 악마적인 존재로 그려내는 우리 수준도 도긴개긴이다. 그래서 "도적"에서는 일본군보다 조선인 친일파가 더 나쁜 짓을 하는 걸로 묘사했나... 설마....




우리의 시각으로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단죄하는 드라마. 빈약한 세계관, 게으른 상상력을 자백하는 것 같아 안타값다.


우리 모두가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져야 된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피해를 입은 주변 이웃국가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일정서를 드라마의 흥행요소로 활용하는 것은 맥락이 다른 이야기다. 정치인들이 반일감정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것과 같은 류의 냄새가 나서 불편하다.


특히나 블록버스터형 오락물에 역사의 고난과 독립을 위한 헌신을 녹여서 뭔가 메시지와 감동을 주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어색하고 무리스럽다. 왜 드라마나 영화에서 장르불문 교훈과 감동, 훈훈한 뭔가를 항상 구겨넣을려고 하는지...


오락물이면 재미에 충실하거나 감동을 주는 서사라면 메시지에 충실하거나. 독립과 민족애라는 대의명분이 오락과 재미, 볼거리를 만드는 설정과 배경으로 기능하는 것이 오히려 더 불편하다. 나만 그런가.


깊이 있고 신선한 서사를 만들 자신 없으면 그만할 때가 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보고 즐기자고 만든 오락용 드라마에 너무 심각한 평을 한건 아닌지 모르겠다. 개고생 했을 제작진, 스탭, 출연진에게 미안한 마음이...


추가 : 단연 돋보이던 캐릭터는 "언년이"(이호정 )였다. 그녀의 매력을 잘 살렸다면 이 드라마가 훨씬 나았을 듯. 드라마 후반에 그녀마저 그저 그런 캐릭터로 소비되는 걸 보고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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