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길고양이를 케어하고 돌봐주는 카페에서 입양해 온 수컷 코쇼(코리안숏헤어 품종. 그냥 토종 잡종 고양이라는 뜻)이다. 이제 대략 집에 온 지도 5년이 다 되어 간다.
이 놈은 건강하고 별 탈 없이 잘 산다. 이 놈이 먹는 종류는 딱 네 종류다. 물, 사료, 츄르, 간식.
사료를 중간에 한번 바꿔 보았지만 설사가 생겨서 원래 사료로 다시 돌아갔다. 물론 이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츄르라고 하는, 짜서 먹이는 액상으로 된 고양이 간식이다. 줄 때마다 매번 환장한다.
어제 츄르를 주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이 놈은 도대체 5년 동안 똑같은 사료, 똑같은 간식만 먹는데 왜 질리지 않을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다른 동물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추론해 봤다. 소가 평생 풀이나 사료를 먹다가 질려서 더 이상 이 것 말고 다른 걸 달라고 한다던지, 닭이 평생 같은 닭모이만 먹다가 질려서 안 먹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선택지가 넓고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의 인간이 같은 음식에 빨리 질려 버리는 유일한종족이지 않을까 싶다.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어떤 사람이 동일한 재화나 서비스를 소비함에 따라 느끼는 주관적인 만족도가 점차 감소한다는 것)이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같은 음식을 연속해서 두 번만 먹게 되어도 피하려고 한다. 아마도 유일하게 한 종류의 음식을 장기간 강제 섭취한 사람은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아닐까. 만두로만 15년.
사람이 갖고 있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은 음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음식뿐 아니라 옷, 집, 차, 오락, 유흥 그리고 문화와 예술 심지어 여친/남친에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물론 개인에 따라 정도의 차이와 기울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만약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우리 집 고양이나 자연에 존재하는 많은 동물들처럼 매일 먹는 단순한 음식에도 항상 즐겁고, 매일 입는 옷, 매일 듣는 음악, 매일 보는 연인이 항상 처음 보는 것처럼 흥미롭고 매력적이라면?
인류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은 사실 더 나은, 더 새로운, 더 좋은 것에 대한 인간의 욕망, 탐욕에 대한 경제학적 정의이고 빠른 상품소비를 미덕으로 여기는 자본주의의 변명일 뿐이다. 이게 무슨 법칙씩이나 되겠나? 원시 부족시대, 고대 노예, 중세 농노, 조선시대 노비나 천민에게도 그런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같은 한가한 이야기가 작동될 수 있었을까?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던 시절엔 한계효용이 낮아질 틈이 없었을 것이다.
현대사회의 빠른 변화에 대응해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인, 조직, 사회가 더 빠르게 혁신하고 변해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변화라는 것이 더 나은, 더 좋은, 더 새로운 것을 더 빠르게 만들어 내기 위해 자원을 더 많이 소진하고 환경을 더 효과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라면?
나의 한계효용 체감이 떨어지는 기울기를 생각해 본다. 나는 빠르게 떨어지는 타입일까, 느리게 떨어지는 타입일까? 더 맛있어 보이는 새로운 음식, 좋아 보이는 온갖 신상들, 더 나은 무언가를 탐하는 내 마음의 욕망을 가만히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