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의 초상

by 옆집 사람

또 그 애가 왔다.

늘 옆이 비어있으면 어찌 알고 참 귀신같이 연락이 오는 그 애.


연락처도 가지고 있지 않고, 소식을 전해 줄 겹지인도 없는데 어쩜 그리 잘 알고 연락이 오는지.


촉이 온 데나. 그 애 말로는.

이쯤이면 되겠다 싶을 때 연락하면 아주 꼭 맞다고.


그래. 올 것이 왔구나.


그래서 우리는 뭐, 늘 그랬던 것처럼 카페에서 만났고, 지난 이야기들을 나눴다. 정해진 서순처럼.


그렇게 몇 마디가 오가고 이제 슬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때쯤, 다음 서순이던 그 질문을 그 애는 꺼냈다.


우리가 이리 대낮부터 만나 차나 한 잔 하고 있는 그 목적에 대한 것.


"오빠. 나는 진짜 안돼?"


몇 번째인데 참 질리지도, 쓰리지도 않는다 싶다.

아주 질척 질척한 것으로는 또 어디 가질 않는 내가 할 소린 아니긴 하지만.


"매번 같은 얘기긴 한데, 지났다니까. 이미. 옛날에는 좋아했지."


"그럼 왜 지금은 아닌데? 나 지금은 별로야?"


"저기 거울 있네. 봐봐라. 이쁘잖아? 니가봐도 이쁘지 않나? 그니까 그런 거랑은 상관없고, 그냥 때가 지났다."


예쁘다는 소리에 배시시 웃다가도 이어지는 말에 금방 그 웃음이 똑하고 부러지는 게 보였다.


"아니 그때가 뭔데?"


"말했잖아. 옛날에 내가 니 쫓아다닐 때. 니 때문에 내가 아직도 누구 만나러 다니면 가방에 우산이랑 스프레이를 넣고 다닌다."


"지금도 넣고 다니는 거면 내 생각은 하는 거잖아? 그런데도 왜 안된다고 그러는 건데?"


"몰라 나도. 그냥 옛날 같지가 않다. 뭐.. 다 썼나 보지. 그때. 그리고 야... 그렇게 무섭게 말하면 있던 정도 도망가겠다."


"왜. 오빠 그런 거 좋아하잖아."


그 얘기에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그래. 그런 거 살살 녹이는 맛이 있긴 하지. 같은 소리들을 덧 데어가며.

그렇게 잠시간의 농들이 오간 후, 그 애는 다시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래. 이번에도 안되는 거네 그러면?"


그 표정을 보니, 이번에도 '도대체 왜 이제 와서 계속 그러는 건데? 이유가 뭔데?'는 또 속으로 삼켜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 대신으로,


"뭐.. 그렇지 않을까?"


라고 뱉었다. 그러고는 집에 갈 채비를 하며 물었다.


"이제 일어날까?"


"아니, 잠깐만 있어봐."


그 애는 가방을 뒤적이며 답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나는 도대체 뭐가 저 속에서 나올까, 하며 조마조마해졌다. 상상도 못 할 부담스러운 것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싶어.


그런 찰나를 참지 못해, 나는 그 애에게 농담을 툭 던졌다.


"뭔데? 거기서 스프레이 나오는 거 아니제?"


그 애는 살짝 웃음 지으며 답했다.


"아니. 종이량 샤프. 나 그림 하나 그려달라고"


뜻밖의 이야기와 뜻밖의 물건이었다.

요즘 손을 조금씩 풀고 있던 건 어찌 알고 이렇게 또 이런 부탁을 하는지. 참 여러모로 요사스럽다 싶었다.


"나 그림 안 그린 지 5년 넘었는데?"


괜스레 이렇게 한 번 거절해 본 내 말에 그 애는,


"그래도 그렸던 시간 절반 정도밖에 안 되잖아"


라고 답했다.


"그런 걸 아직 기억한다고?"


"알면 좀 넘어오던가."


그 말은 슬그머니 뛰어넘어 나는 답했다.


"뭐 그려달라고?"


"당연히 나지."


"나 좀 비싼데?"


"여기 카페도 비싼데?"


그런 뻔뻔함에 나는 못 이기는 척 그려주기로 했다. 사실은 처음부터 그려줄 것이었지만. 마지막 선물이거니 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그 애가 건네준 도구들을 좀 살펴보니, 나는 무언가 흑연을 문지를 것도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야 설마 면봉도 있나?"


"당연히 있지"


하고 배시시 웃으며 그 애는 가방에서 면봉을 슬 꺼내 주었다.


이런 것들이, 나를 이렇게나 참 잘 아는 면들이 이제는 참 안타깝다는 기분이 들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빛바랜 사진 너머로 지난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그런 안타까움.

내가 상상도 못 할 까마득한 옛날 일 같은 그런.


마지막이니 만큼, '조금만 더 빠르지 그랬냐.'는 속으로 삼켰다.


그러고는 뭐, 슥슥 하고 샥샥 하곤 하는 그런 한 시간이 지났고, 나는 그 애에게 그림을 건네었다.


그 애는 그 그림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오빠는 사람을 참 예쁜 눈으로 보더라."


라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눈은 그대로 그림에 둔 채, 그 애는 내게 말했다.


"오빠. 이거 오빠 카톡 프사 해줘."


"되겠냐"


"그럼 인터넷에 올려줘. 사람들 많이 다니는 곳에. 네이트판 막 이런 데다가. 오빠 그 글 쓴다는 곳에도 이거 올려주면 안 돼?"


"왜?"


정말로. 왜?


"그냥. 나랑 오늘 만났다는 거 세상 사람들 다 알았으면 좋겠어서."


그렇게 말하는 그 애는 조금 먼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못 그렸는데?"


라고는 했지만, 그 애의 표정을 보고는, 그 기분을 나 또한 잘 알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 그 정도는 뭐. 기왕 올리는 김에 오늘 했던 얘기들도 엮어서 써줄게."


"아싸! 그러면 그 글 쓰는 곳 어딘지도 좀 알려줘"


"그건 싫다니까"


"와.. 치사하다 진짜. 내가 찾고 만다."


"그래라. 생각보다 찾기 쉬울걸? 내가 쓴 글 몇 자만 구글에 검색해도 나오는 곳이라."


"그러면 좀 알려줘"


"그건 싫다니까."


"왜?"


...


이후에도 이렇게 자잘하게 틱탁거리며 우리는 카페를 나섰다. 하늘이 참 높고도 파란, 그런 추운 날이었다. 가볍게 손 인사를 하고 우리는 각자 군중 속으로 섞여 흐려졌다.


나는 지하철에 오르며 그 애가 있는 대화방을 지우고, 통화 수신 기록을 지우며 이 글을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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