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출판사 구픽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006
새로 시작하는 1인 출판사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만큼 첫 출간 도서의 선정은 중요하다. 사실 그 점에 있어서 구픽은 약간 애매한 편이다. 앞서 내가 좀 순간적인 판단을 많이 한다는 얘기를 언급한 적 있는데 첫 책 또한 그랬다. 1인 출판사를 창업할까 싶은 마음이 슬금슬금 들 무렵, 출판사를 준비하던 다른 분을 지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해외 장르소설 라인업을 갖추고 번역까지 대부분 완료한 상태였는데 사정으로 출판사 창업을 할 수 없게 되신 것.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받아본 라인업은 무척 훌륭했고 욕심이 났다. 계약상의 문제만 해결되면 모두 해봐도 괜찮겠다 싶었지만 그 정도 경제적 여건은 되지 않았고 따로 계약을 염두에 두고 있던 소설들도 있어 그중 두 편만 선택하게 되었다. 그 두 편이 구픽의 첫 책인 《아머》와 《대우주시대》다.
다행히 두 편 모두 에이전시 한 곳에서 판권을 관리하고 있어 번거롭지 않게 국내 출판권을 이양받을 수 있었고 번역 원고까지 모두 구비된 상황에서 가장 빠르게 낼 수 있는 책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이 둘 중 한 편을 첫 번째 책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첫 출간작이 된 것이 《아머》이다. 밀리터리 SF를 표방하는 《아머》는 1984년 작으로 미국에서 출간된 지 30년이 넘게 지난 작품이지만 한국에서는 한 번도 번역 출간된 적이 없었다. 해외 팬덤이 확실한 나름 분야의 준고전적인 작품이었지만 워낙 나온 지 오래되어 잘 팔릴지 어떨지에 대한 확신은 거의 없었다. 나름 출판사를 만들고 처음으로 나오는 작품인데 책임감 없이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구체적인 마케팅 계획이나 깊은 생각 없이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했다. 미리 받아본 번역 원고의 묵직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고 SF는 좋아만 했지 직접 만들어본 적이 없었던 터라 꼭 한 번 만들어보고 싶기도 했다.
《아머》처럼 단권으로 끝나는 작품이 아닌, 시리즈였던 《대우주시대》는 작품 선택에 약간의 고민을 했다. 시리즈를 좋아하는 독자 입장으로서, 이전 회사에서도 시리즈 소설을 많이 만들어본 편집자로서 시리즈를 지속해서 출간하지 못할 거라면 아예 손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기에 마지막까지 좀 망설였다. 《대우주시대》 역시 SF이긴 하지만 《아머》와는 거의 180도 다른 분위기의 소설이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번역 작업이 완료된 원고가 너무 재미있다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시작도 하기 전에 너무 쫄아 있나? 이 정도 재미면 국내 팬덤 충분히 생기고 시리즈 쭉쭉 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자 시리즈 표지 콘셉트도 머릿속에 속속 떠올랐고 SF 시리즈라니 완간 후 얼마나 멋질지 상상도 되기 시작했다. 계약하자! (책 이야기는 이후에 다시 하게 될 테지만, 예상들은 좀 많이 빗나갔다.)
1년에 몇 권을 출간할까도 생각해보았다. 이전 회사에서 워낙 자주, 많이 책을 만드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어서 구픽에서도 재밌는 책을 욕심나는 대로 많이 출간하고 싶었다. 하지만 작은 곳에서는 당연히 제작비의 한계에 부딪히고, 무엇보다도 그만큼 다양한 타이틀을 빠르게 확보하지도 못한다. 10여 년 전만 해도 일단 창업하면 빠르게 열 권 정도를 만들어내서 구간들이 시장에서 돌아가게 해야 출판사를 유지할 수 있는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고 했지만 이제는 적어도 30권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
30권이라니…. 1인 출판사로서는 느리지 않은 속도로 1년에 약 5권을 출간하다고 해도 30권이 되려면 5~6년은 지나야 한다니. 2015년 사업자 등록증을 받아 들 때만 해도 2020년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때까지 버틸 수나 있나? 정말, 창업한 후 손에 잡힌 직접적인 작업물이 없을 때는 출판사에 오래 근무했던 것이 무색하게 내가 일한 분야 외에는 문외한이어서 캄캄한 방에서 전등 스위치를 찾는 느낌이었다. 확실하게 보장된 것도 없어 매일매일 가진 자본금이 언제 떨어질까 걱정도 끊이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