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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thew Nov 11. 2020

악한 사람들 (Evil Men)

당신은 어떤 시선으로 '선'과 '악'을 정의하는가?

제목 : 악한 사람들 (Evil Men)

저자 : 제임스 도즈

링크 : http://www.yes24.com/Product/Goods/91587555?OzSrank=1


"그(아돌프 아이히만)의 말을 오래 들을수록 언어 구사 불능이 사유 불능, 즉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사유할 수 없음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떤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그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을 막는, 따라서 현실을 막는 안전한 방호책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라고 아렌트는 책에서 말한다. 아이히만은 그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인식하지 못했다"라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이것이 악의 모습이다.
p47.


트라우마의 핵심은 "그것을 깨닫거나 이해하는 데 지체나 미완이 일어나고, 계속 다시 돌아감으로써 사건에 절대적으로 충실한 상태가 압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 말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 사건은 극심한 충격으로서, 그것을 겪는 사람이 어떤 의미로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므로 일반적인 범주의 지각과 해석으로는 처리할 수 없다. 그 사건은 경험하는 행위를 압도해버린다. 그리고 영원히 이해에서 벗어나고 인격을 형성하는 기억의 지도에 통합되는 것을 거부하므로 생존자는 끊임없이 그 사건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p57.


앨런 펠드먼은 때로는 이 패턴(피해자에 대한 인권활동)이 정치적 테러의 피해자를 "공적 감정의 시장을 위한 상품"으로 변형시킨다고 비난한다. (...) 그러나 펠드먼은 실종된 자식들을 위한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는 기념관 건설을 거부한 아르헨티나 마요 광장의 어머니들을 언급하면서, 일반 대중의 집단적 추모는 개인에 대한 '사적인 망각'처럼 느껴지고 기념은 '궁극적인 삭제'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말한다.
p60.


우리는 타자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것을 악이라고 부르면서 '타자'에게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만 보게 된다. 결국 "모든 외재성, 모든 낯선 것은 우리에게 악한 것"이다.
p64.


슬픈 진실은 대부분의 악은 악이나 선을 행하겠다고 결정한 적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다는 점이다.
p65.


우리는 공동체를 형성해 서로 강한 유대감을 구축하는 사회적 존재이므로 악랄하기도 하다. 격렬한 외국인 혐오증은 열렬한 내집단 동일시로 인한 부차적 결과였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증오한다. 우리는 보호하려는 것이 있기 때문에 공격적이다.
p77.


사람들을 그렇게(폭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체제는 복종과 순종에 대한 정상적인 인간의 충동을 활용하는 대신 그 충동을 폭력으로 향하게 한다. 한 영국인 군인은 그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인의 세계에서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필사적인 젊은이에게 군인의 용맹함이 남성성의 전형이라고 믿게 하는 것, 통솔자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 것, 엘리트의 일원이 되게 함으로써 과장된 자존심을 심어주는 것, 공격을 중시하고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은 이들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어떤 곳에서든 그를 관리할 도덕적 제재 없이, 어떤 수준의 폭력이든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것이다."
p90.


'순수성'은 여기서 특히 유용한 개념이다. 한 문화가 양자택일적인 양극화된 사고를 잘 발전시킨다면 세계를 순수한 것과 순수하지 않은 것으로 분리할 수 있다. 순수하지 않은 것은 상처를 받아 마땅하다. 순수하지 않은 것이 본질적으로 혐오스럽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순수한 것의 공동체를 오염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 리프턴은 이를 "집단적인 증오, 이단자 제거, 정치적/종교적 성전"의 요소라고 말했다.
p100.


폭력은 우리가 주눅 들고 약하고 무기력하고 느끼는 삶의 끔찍한 순간들을 보상해준다. 선행은 만족감을 줄 수 있지만 복종적인 경향이 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폭력은 자유이다. 폭력은 삶의 매 순간마다 우리를 단단히 붙드는 제약과 의무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p129.


군인들은 왜 여성들을 강간하는가? (...)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욕구보다는 폭력, 경쟁, 불안 같은 특징을 강조하는 강간론을 선호한다. (...) 가부장제 문화에서 '남성성'은 승자와 패자로 이루어지는 성취이자 경쟁으로서 정체성에 관한 문제라고 그들은 설명한다. (...) "그들이 강간을 저지르는 건 주위에 남자들이 많이 있어서죠. 그게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들은 서로에게 자기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요. '나는 할 수 있어'라는 식으로요. 혼자서는 하지 않을 행동이죠.
p143.


고백은 개인과 사회를 치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오염된 국가의 날조와 맞서 싸우고, 공적 담론이 생존자들의 개인적 현실을 폭력적으로 부인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고백은 사회적 현실을 재구축한다.
p203.


심오한 의미에서 인간의 동기는 알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들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이다. 이야기가 변화를 가져오는가? 이야기가 행동을 돕도록 하는가? 인권 분야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한다.
p291.

우리는 악(惡)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나쁘다' 보다 좀 더 심오한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나쁘다는 말은 비난의 표현으로도 쓰이지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상대를 귀엽게 칭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그러나 은 다르다. 이 표현이 쉽게 쓰이지 않는 만큼 어떤 대상에게 악하다고 표현했다는 것은 이미 나쁨을 넘어서 더 심각한 단계까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속 깊이 혐오를 느끼면서 차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탈도덕적 상태의 대상으로부터 악함을 느낀다.


기독교의 성 아우구스티노, 성 바실리오 성인은 악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악(惡)은 다름 아닌 선(善)의 결핍이다.

 

기독교의 교리는 태초부터 악한 존재라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선에서 유래되지만 어떤 이유 또는 계기를 통해 마음속에서 선을 잃게 되면 비로소 악한 상태가 된다. 선을 수호하는 천사인 '루시퍼(Lucifer, 샛별)'도 신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고 결국 타락한 천사가 되었다.


인간이란 존재를 가톨릭 교리를 통해 설명하자면 '하느님 구원 사업의 도구'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은 하느님의 도구로서 세상에 존재하며, 말씀과 신앙을 이웃에 전파하고 모두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것이 하느님이 신자들에게 맡겨둔 선교(Mission)다. 근본적으로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선함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적 관점에서 선의 근원인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선한 존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쁜 행동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해 자세하게 자료를 찾아본 것은 아니라서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양심'을 통해서 어렴풋이 나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블리자드의 유명한 RTS 게임인 스타크래프트 2 : 자유의 날개에서, 테란 자치령 UNN 뉴스 앵커 도니 버밀리언짐 레이너에게 날리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UNN의 도니 버밀리언
제임스 레이너, 당신에겐 양심도 없습니까?


양심이 없는 것, 즉 '선의 결핍'은 우리가 나쁜 행동을 저질렀을 때 아무런 심적 가책을 못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만약 악이라는 것이 선에 대한 부정이었다면, 착한 행동과 마음을 가지는 게 싫어서, 또는 선이라는 개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음에도 악한 행동을 한다면, 이것도 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분명히 마음속에 선이 결핍된 상태는 아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악한 행동을 저질렀을 뿐이다. 또는 어떤 초월적인 권위 아래 어쩔 수 없이 악한 행동을 해야 한다면 이것도 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도니 버밀리언은 악튜러스 멩스크 치하 테란 자치령이라는 강력한 군사 정권의 언론사 앵커다. 나라에서 지명 수배한 '범죄자' 짐 레이너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방송에서 언급했다면, 그는 그다음 날 TV에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환경에서도 꿋꿋이 선울 수호하며 진실을 전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렵다.


멩스크는 사라 케리건과 관련된 사건 때문에 본인을 배신한 짐 레이너를 마음대로 '범죄자'로 규정해버리고 온 은하계에 수배령을 내린다. 스타크래프트를 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사실 진짜 나쁜 놈은 악튜러스 멩스크다. 만약 짐 레이너가 멩스크에게 사로잡혀 사형당했다면, 은하계 역사는 멩스크를 코랄의 후예를 승리로 이끌고 강력한 테란 자치령을 세운 영웅으로, 짐 레이너는 극악무도한 반란군 우두머리로 기록했을 것이다. 후손들은 짐 레이너와 사라 케리건을 악인으로, 악튜러스 멩스크를 선인으로 기억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선인이 사실은 악인이라면, 이를 바르게 기록하지 않고, 똑바로 보지 못하는 우리들이 악한 것은 아닐까?


좀 더 생각해볼거리가 또 있다. 이번엔 어린아이들을 한번 지켜보자. 아이들은 사회적 규범에 대해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나쁜' 행동을 저지른다. 예를 들면 사람을 때린다거나, 공공장소에서 방해될 만큼 시끄럽게 떠든다거나, 작은 동물이나 곤충을 죽이는 행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행동도 진정 악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악이라는 것이 단순히 인간이 만든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람들은 왜 악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저지르게 되는 것일까?


모든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명제에 대해서 알고 있다. 이렇게 간단한 개념을 알고 있음에도 나쁜 행동을 저지르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악한 사람들'에서는 악(惡)에 대한 정의와 왜 사람들이 악한 행동을 저지르는지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1. 개인적 특성인가, 내집단의 영향인가?


나치즘, 군국주의, 전체주의, 제국주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전쟁과 폭력을 야기한 이데올로기들이다. 이 개념들을 볼 때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군대, 일치, 단결, 충성, 맹신, 우월


나치 독일, 소비에트 연방, 일본제국은 강력한 지도자의 통치 아래 일치된 국민성을 보여주며 자신들의 국가/정치관을 전 세계로 넓히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이런 이념에 속해있던 사람들은 본인의 폭력이 '정당하다'라고 믿었다.


나치 : 위대한 아리아 민족을 위해 독일제국 발전에 해가 되는 유대인을 말살해야 한다.
소련 :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위해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일본 : 천황과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군대에 의한 학살(genocide)은 이러한 이념에 따라 행해진 폭력이다. 가학적이고 끔찍한 폭력을 휘둘렀던 그 나라의 군인들은 그들이 속한 조직 정체성, 이상적 사회상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이 이념들은 폭력을 미화하고 정당성을 부여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폭력적 행위에 영광스러운 목적이 있다. 우리 민족을 위해, 민족의 해방을 위해,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을 위해.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런 생각들이 죄 없는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더 나아가 이런 이념들은 단결과 일치, 그리고 내집단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국민들은 힘을 합쳐야 한다. 통수권자의 명령이 있다면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아니면 모두 열등하다." 열렬한 내집단 동일화는 놀라울 정도의 단결성을 보여주지만, 다른 공동체를 극단적으로 배척하거나 강한 공격성을 드러내고 만다.


어찌 보면 이런 이념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본인들의 공동체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지키고 싶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폭력성을 보였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우월한 본인들의 공동체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오염되거나 파괴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공격적으로 대응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본능은 사실 인간에게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증오한다. 보호하려는 것이 있기 때문에 공격적이다. 다만 마음에 다른 공동체에 대한 존중은 없을 뿐이다.


이를 좀 더 미시적으로 접근해보자. 범죄자들을 조사하다 보면 '불우했던 어린 시절'이라던가,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와 같은 환경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자주 접한다. 호통판사로 유명했던 천종호 소년재판 판사님은 청소년의 비행은 환경적인 어려움과 마음에 상처가 원인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소년 그룹홈을 만들고 정기적으로 아이들과 소통하며 그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한 것이 세간에 알려졌다. 천종호 판사님 또한 '악'이 주변 환경에서 영향을 받는다고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처음부터 나쁜 아이들은 없다. 그저 상처 받고 살아서 나쁜 행동으로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2. 탈개인화


1번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강력한 하나의 이념 아래 모인 공동체 내부에서 개인은 독립적인 개인으로 존재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이런 공동체에서 나의 신념이나 개인적인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공동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서 내 생각보다는 전체적인 상위 방향성을 위해서 행동한다. 즉, 주체적인 나를 벗어난 상태(탈개인화된 상태)가 되어 공동 목표를 향해 로봇처럼 움직일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 '타인'은 그 존재가치가 점점 흐릿해진다. 남들도 나와 똑같은 기계의 부속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개체라면 그 존재가 지닌 가치를 훼손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나에겐 그것을 훼손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개인화 상태에서는 상대가 이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걸 목격하면 적극적으로 이를 바로잡기 위해 상대의 영역으로 서슴없이 진입하게 된다. 본인 스스로는 공동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류를 수정'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이것이 결과적으로 상대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 있다면 이것을 느끼는 것은 힘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책은 중국에 수감되어 있다가 일본으로 귀환한 전범들로 구성된 '중국 귀환자 연락회(중귀련)'의 인터뷰를 기반으로 쓰였다. 여러 인터뷰 중 위에서 언급한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부분이 있었다. 한 회원은 '사람'을 죽인다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저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죽이는 정도의 감각만 있다고 말한다. 이념 교육에 의해 중국사람은 '더러운 중국 놈', 러시아 사람은 '돼지', 서양인은 '털북숭이 원숭이'로 세뇌 교육을 받는다. 다른 인종이 본인과 같은 '사람'이 아닌 그저 살아 움직이는 동물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으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일본군에 있어서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은 그저 동물에 불과했다. 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서 이런 방해 요소를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국가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는 행동이라 믿었을 것이다.



3. 언어적 표현을 통한 미화


저자 제임스 도즈는 폭력을 미화하는 언어적 표현을 꼬집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국가 원수 또는 언론사는 이를 미화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대중은 완곡하게 순화된 언어적 표현 때문에 폭력적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적을 남김없이 말살했다'대신 '소탕했다' 또는 '깨끗이 청소했다'와 같은 표현으로 대체하여 보자. 대규모 폭력적 사건이 일어나는 전쟁이 마치 일상적인 사건인 것처럼, 스포츠나 게임과 같은 흥미로움을 전달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표현이 직접적이면 직접적일수록 대중은 해당 사건에 심리적으로 거리가 가까워진다. 어떤 사람이든 가장 잘하는 것이 상상이다. 모든 묘사가 직접적이라면 우리는 머릿속으로 그 상황을 구체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 물론 전쟁은 매우 폭력적이기 때문에 상당한 불쾌감이 들겠지만 말이다. 사실 정부와 언론은 대중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싶지 않아서 순화된 표현을 통해 심리적으로 '거리두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를 정치적으로, 떳떳하지 않은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일본제국의 도조 히데키 내각총리대신은 치안유지법을 확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반정부주의자, 반군국주의자, 공산주의자, 반체제 조선인, 일부 종교지도자 그리고 공공질서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치안유지법은 일본제국 이념에 반하는 행동을 규제하는 법안으로 신문, 출판물, 언론, 집회, 결사에 대해 강력한 통제를 가한다. 이 치안유지법이 확장되면서 7만 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엄연히 한 국가에 대한 폭력적 행위지만 '공공질서에 위협'이라던가 '통제를 강화했다'따위의 표현으로 그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이 나라의 치안을 위해서였다라는 것처럼 들리게끔 말이다.






이 책은 악과 선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지만 이 글에 모든 것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양이 많아서 힘들 것 같다. 소개하고 싶은 내용이 더 많지만, 책을 읽을 사람들을 위해 아껴두어야 할 것 같다.


사실 첫 페이지와 표지를 보고서는 '전범 인터뷰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스토리텔링'인 책이 아닐까 싶었는데, 너무 어렵고 철학적인 책이었다. 또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이 책은 악과 선에 대한 직접적인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다양한 관점이 있고 이 책을 읽는 너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제임스 도즈가 내린 결론이다.


그래도 심리학적, 환경적, 국가적으로 왜 이런 일이 생겨났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를 던져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생각할 거리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기쁘다. 악과 선에 대해 항상 단편적인 부분만을 보고 살다가 비로소 옆면과 뒷면을 어렴풋이 확인했다랄까. 내가 이런 개념에 대해 생각을 할 때 다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힌트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딱 하나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행동이 과연 옳은 일일까에 대해 의문이 있는 경우 그 행동을 멈추게 된다. 확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 제임스 도즈 또한 전범들의 인터뷰를 공개하고 대중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관점 때문에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행동'이 실천되지 않는 것은 더 큰 위험이라고 말한다. 선과 악을 떠나서 본인이 어떤 방식으로 트라우마와 폭력성을 극복하겠다는 신념이 담긴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폭력적인 사건을 다루는 것이 피해자들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일 수 있으며 대중들에게는 '폭력의 포르노그래피(폭력적인 사건을 보고 즐기는 마음)'를 제공할 수 있음을 걱정했다. 그러나 결국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사실을 숨기는 것에 불과하다. 타산지석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듯, 이런 폭력적인 사건을 책과 인터뷰를 통해 접한다면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악의 근절이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런 피해자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모두가 평화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착하기만 해서는 안되고 우리는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모두가 악을 감시하고 선을 실천해야 비로소 세상에 '선의 충만'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우리의 무관심이 악을 키우는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까에 대해 반성해 보아야할 시기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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