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말이야, 너무 많이 알아서 무식해."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p245.
"喜怒哀樂"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해보니, 그래도 인생에 즐거운 구석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뛸 듯이 기뻤던 순간은 몇 안되지만, 맛있는 음식 먹고 큰 걱정 없이 산다는 것만으로도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기쁨과 즐거움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그리고 분노와 슬픔은 나를 성장시키는 따끔한 동기부여가 된다. 감정은 나를 좀 더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없다. 내가 표현하는 느낌은 다른 사람이 결코 따라 할 수 없다. 다만 공감할 수 있을 뿐이다. 온전히 내가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희로애락은 다른 사람과 나를 독립적으로 분리시키면서도, 반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공감하게 해 줄 수 있는 역할을 해준다는 점에서 참으로 오묘한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기계처럼 산다면 과연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무래도 좀 힘들지 않았을까.
아니다. 잘못 생각했다. 힘들다는 것도 감정이다. 힘들다는 것도 모른 채 그냥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으니까 배고프면 밥 먹고, 누가 말 걸면 대답하고, 졸리면 자고. 그 안에서 지루함이나 외로움 따위는 모른 채 인생을 채워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무언가를 이루어도 성취감이 없고, 좋아하는 취미도 없고, 사랑도 없고 연애도 없을 것 같다. "감정"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이런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혐오의 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곳에서 다양한 대상을 상대로 혐오의 표현이 쏟아지고 있다. 예전엔 가십거리나 일부 연예인 또는 정치인에 한해서 그랬다면 요즘은 사람은 물론이고 기업, 소상공인, 성별, 종교, 정치사상에 대해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도 많은 혐오를 표출하고 있다.
'그냥 평화롭게 살면 안 되나?'라는 생각은 이제 순진한 것 같아 보인다. 나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평화보다는 투쟁을 선택해야 하나 라는 고민이 든다. 가만히 있어도 공격받는 경우를 여기저기서 자주 접한다. 내가 하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불편함을 초래하지 않는지 더 생각하게 되었다. 감정이 살아 있다 보니 더욱 조심스러워진 것 같다.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조심스럽고, 위험해 보이고, 해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감정"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이런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 '윤재'는 선천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의 의도나 아름다운 책의 문장을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그저 보이고 들리는 대로 머릿속으로 이해할 뿐이다.
이런 윤재에게도 소중한 친구가 생긴다. 곤이.
곤이는 '분노'의 감정을 대변하는 친구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완벽하고 고상하길 바라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 분노로 비뚤어진 곤이는 세상 모두와도 등을 지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처음엔 병신 같다며 멀리하던 윤재와 가까워지는 것을 보면 재미있다. 한쪽은 너무 감정이 풍부하고, 한쪽은 너무 이성적인데 책에서 보이는 둘의 조합 덕분에 살짝 미소가 지어진다. 곤이가 서서히 마음을 연 것도 이런 점에서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이 소설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감정의 중요성'따위가 아니다. 감정이 있건 없건, 윤재에겐 소중한 친구가 생겼고 그런 친구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까지 걸었던 점이 중요한 것 같다. 어쩌면 감정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다만, 곤이를 위해서 그 위험한 장소에 발을 딛는 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정말 득 될 것이 없는 선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재는 왜 곤이를 위해서 그렇게 까지 행동을 했을까? 그건 주인공 윤재만 알고 있겠지.
넌 말이야, 너무 많이 알아서 무식해.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윤재에게 곤이가 하는 말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말로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감정이라도 시시각각 느낌이 다르고, 같은 표현이라도 뉘앙스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되기도 한다. 아마 윤재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 평생 무식할 것이다.
그러나 윤재가 우리에게 던질 수 있는 말이 있다.
넌 말이야, 너무 많이 느껴서 두려워하는 것 같아.
우리는 많은 것을 느끼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괜히 끼어들어서 손해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처음 시작하는 것은 결과를 알 수 없어서 무섭다. 그러나 윤재는 '공감'한다는 사람들이 정작 쉽게 잊고 행동하지 않는 점을 꼬집었다. 성경의 아담과 하와는 금기의 선악과를 먹은 후 부끄러움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낀다. 우리 몸속의 '아몬드'는 선악과 같은 것이 아닐까.
소중한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적어도 그 사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려울 때는 철저히 이성적으로 계산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나도 나이를 먹었는지 축하해줄 때도, 어려움을 위로할 때도 나도 모르게 득실을 따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감정이 없는 윤재보다도 사랑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번쯤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