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과 현생에 대하여

'90년대생과 나'로 작문하시오.

by 홍핑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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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선생님 어렸을 땐 뭐 봤어요?

어제 유튜브에서 봤는데 꽃보다 남자가 그렇게 인기가 많았어요?


99년생인 H는 자신이 벌써 이런 질문을 들을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긴, 09년생 중1들에게는 나도 어른이려나. H는 교탁을 출석부로 두 번 치곤 선생님은 그런거 모른다~ 하고 어른인 척하며 자리를 떴다. 교생인 자신에게 조례를 떠넘기고 간 79년생 담임 K에 대한 잔잔한 원망과 함께. 아아 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뒤따랐지만 아이들은 금세 잊고 자기들끼리 떠들어댔다. H는 교생실로 걸어가며 꽃남 소이정에 환장했던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90년대 끝물에 태어난 H는 로망이 많았다. 열심히 공부하고 어른이 되면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다. 꽃남 주인공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낭만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만의 집에서 여유롭게 드라마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을 벌고 꽤나 열심히 모으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변의 언니오빠들도 그럴 수 있을거라 믿었다. 역사시간에 배웠던 계급이 나눠진 왕정시대와 지금은 다르다고 믿었으니까. 그 때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H는 열네살 때 잔잔히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무슨 맹목적 믿음을 가졌길래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을까. H는 열 네 살 때 떠올리지 못한 질문을 지금에서야 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때는 ‘꿈을 논하는 시대’였다는 걸. 열심히 하면 무엇인가라도 될 수 있다고 했으며, 자기계발서가 유행이었다. 지금은 불합리한 과거와는 다르며, 그러므로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그 노력의 방향성이 공부에만 초점이 맞춰진 건 잘못이었지만. 어쨌든, 공부를 열심히 하면 무엇인가라도 될 것이라고 어른들은 말했다. 당시 H는 그 말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H는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야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른들의 말은 사실이 아닌 주장에 불과했다. 기생충을 보고 나서야 지금의 시대가 역사책의 순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3년동안 치열하게 연애한 남자친구와 임용고시 문제로 헤어졌을 때 낭만적인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92년생 선배는 기간제교사로 전전긍긍했고, 98년생 언니는 월세 계약이 끝나 전세대출 상담을 받으러 다녔다. 그리고 H는.

H 선생님. 다음 교시 수업 있으세요?

아니요 없습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그러는데 오늘 우리반 애들 수업 좀 봐줄 수 있어요? 그냥 대충 자습만 시켜줘.

네. H는 짤막한 대답을 던지고 담임의 전화를 끊었다. 마침 종이 쳤고, H는 교실로 들어갔다. 애들은 왜 쌤이 또 들어오시냐는 둥 웅성거리더니 금세 유튜브를 보여달라고 졸랐다. 일진 참교육, 여우 참교육, 무슨무슨 참교육, 사이다썰… 아이들의 주장은 기묘하게 하나로 뭉쳤다.

그건 좀 그런데. 아까 너네 꽃남 궁금하다며 그거나 조금 보여줘?

에이 쌤 누가 요즘 그런 걸 봐요. 어짜피 현실에선 그런 일 없는데.

맞아요. 요즘 어른돼도 집도 사기 힘들다면서요?

야 드라마잖아!


H는 3초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쟤네는 그걸 벌써 아는구나. H는 로망의 세대였던 자신의 어린시절과 팍팍한 현실 속에서 유튜브로나마 사이다를 찾는 아이들의 삶을 대조했다. H는 그나마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말이나 행동 따위를 떠올려보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90년대에 태어난 어른은 2022년에 꿈을 논할 수 없었다. 2022년에는 꿈을 논하는 어른의 얄팍한 주장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는 생각했다. 거창한 꿈은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말해줄 사람은 여전히 필요하지 않을까. 긴 일상은 현실만으로 채워지기에는 너무 팍팍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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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과 현생에 대하여, 김핑키


이번 글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런치북 공모까지 열심히 달려왔으니, 이제 다시 주 1회 정기 연재로 찾아뵙겠습니다.

정기 연재 요일은 금요일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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