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고 싶은 날

'백신'으로 작문하시오

by 홍핑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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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번번이 손이 베었다. 새끼손가락 맨 끝마디, 세 번째 손가락 손톱 바로 밑, 네 번째 손가락 첫 마디의 주름. 바쁜 나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고, 휴지를 손가락에 감는 일은 인쇄된 종이를 부수별로 정리하거나 간지를 갈아끼울 페이지를 찾는 따위 일의 속도를 느리게 할 뿐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걱정하지 않았고 흘러나온 피가 종이에 묻어나오는 것을 걱정했다. 제안서 표지에 묻거나, 첨부자료 중 이십사페이지 뒤편에 묻는 일들. 제안서를 받는 사람들이 첨부자료를 넘기다가 이 피를 보면 섬뜩하려나. 그 정도로 넘겨보긴 하려나. 기계적으로 제본된 자료를 정리하며 생각했다.


수연씨, 우리 제안서 제본 다 됐어?

네 과장님.

고생했네. 이번 주만 지나가면 좀 나을 거야. 나도 허리 아파 죽겠다. 병원을 몇 주째 못 간 거야 진짜.


그 ‘이번 주’가 3주째 반복되고 있다는 건 인식하셨을까. 나는 자본주의 육십퍼센트, 진십 사십퍼센트가 담긴 걱정을 보내며 쇼핑백에 제본된 자료를 집어넣었다. 방금 전 베인 새끼손가락을 높이 쳐든채로. 피가 묻지 않게 하기 위한 애처로운 노력과 별개로 내 피는 이 회사에서 ‘백신’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일종의 산재에 대한 티끌만큼의 파장이나 면역력을 제공하지 못했다. 한 해의 가장 바쁜 시기에 고용된 행정보조 아르바이트생에게 반창고 찾아볼 시간은 사치였다. 짬을 기어이 내어 찾아봐도, 대표실, 사무실, 창고 기껏해야 쓰리룸으로 구성된 사무실 한 귀퉁이를 뒤져봐도 그 흔한 뽀로로 밴드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사실 뭐, 요만큼 피나는 거 가지고. 당연하지. 나는 요령을 찾았고 그것은 그냥 베인 손가락을 쪽쪽 빨아 피를 먹는 것이었다. 질펀한 침이 질근질근 묻은 손가락은 피가 흐르지 않았다. 황갈색 정도로 종이에 묻는 경우는 있었지만 피 같지는 않았고 다만 종이에 뭐가 묻었구나 싶은 정도였다. 나는 새끼손가락에 침을 묻히며 창고로 들어가 내일 제본에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비닐표지가 담긴 박스들, A4용지 묶음이 4개정도 담긴 박스들을 날랐다. 손가락이 찍힌 건 순식간이었다. 새끼손가락을 쳐들고 나른 게 원인이었을까 싶다. 박스를 받치던 손가락들을 빼지 못한 채로 박스를 쿵 하고 내려놓았다. 무게를 이기지 못했으니,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박스는 내 손가락을 짓눌렀다. 미친, 금 간 거 아니야? 손가락이 깊숙이 얼얼했다.

수연씨 괜찮아?


과장은 모니터에 시선을 꽂은 채로 손으로 허리를 두드려대며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둘러대곤 마지막 박스를 마저 옮기려 창고로 갔다. 들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영부영 찌릿함을 참았다. 병원 갔는데 금 간 거면 어떡하지? 박스를 나르며 나를 걱정하는 건지 내일 출근을 걱정하는 건지 회사를 걱정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걱정만 되뇌었다. 과장은 내가 박스를 옮기는 걸 흘깃 보더니 도저히 안 되겠다며 허리에 파스라도 붙이고 오겠다고 자리를 떴다. 어느 정도로 상처가 나야 그 상처를 존중할 수 있는 시간을 부여받을 수 있을까. 어떤 상처가 백신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과장이 나간 문을 보며 손가락을 부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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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고 싶은 날, 김핑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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