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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지 Nov 30. 2019

매드맥스, '여성'만큼은 SF가 아닌 영화

악개의 리뷰 : 매드맥스를 30번 본 여성의 만취 리뷰


 본 리뷰는 비행기 위에서 와인을 6잔쯤 먹은 매드맥스 찐덕후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리뷰의 탈을 쓴 맥비어천가이며, 덕심만큼 장황한 동시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고지하였어요.


내가 태어나서 가장 많이 본 영화를 꼽자면 단연 매드맥스다. 처음에 카레이싱 영화인 줄 알고(?)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오프닝 씬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허벅지에 마운틴듀를 다 쏟았다. 그 후 극장에서 내리는 그 날까지 용아맥 왕아맥 3D 4D 가리지 않고 N차를 찍었고, TV로도 엄청나게 봤다. 일단 기내 엔터테인먼트에 있으면 무조건 본다. 그냥 무조건.

이게 어느 정도로 무조건 보냐면, 환승 비행기를 타는 경우 환승지까지 매드맥스 보고 환승지에서 목적지까지 또 매드맥스 본다. 살면서 강박적으로 했던 일이나 변태적으로 했던 일이 뭐냐고 하면 다소 시시하더라도 ‘매드맥스가 있다면 매드맥스를 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컷 하나하나가 예술이고 그 컷을 조합한 방식은 더 예술이고, 자동차 터지는 전투씬에서 실제로 자동차를 불태운 것은 물론 기타 치는 인두껍 연예병사 좌우지장지지지의 연주가 실제 라이브였으며 뿜어져 나온 불도 진짜였다는 점 등 덕후들이 치인 포인트를 집어내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오늘 3n번째 시청하면서 느낀 이 영화의 입덕 포인트는 이 영화가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서운할 수 있겠지만 먼저 짚고 넘어가겠다. 나는 ‘대표적인 한국영화’로 일컬어지는 톤의 작품들을 언젠가부터 안 보게 되었다. 먼저 내가 젠더 감수성 풍부하고 세심하게 연출된 수많은 한국 영화들을 발견하고 시청할 정도의 식견과 열정이 없었던 것은 반드시 반성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이 시간에도 수많은 감독&작가님들이 ‘한국영화’의 전형으로 대표되는 이미지를 타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고 계실 것이다. 다만 그것이 ‘영(화)알못’인 나에게 도달할 정도로 거대 자본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은 아쉽다. 지금부터 내가 언급할 ‘한국영화’에 그분들의 작품은 해당되지 않는다. (이 글은 2018년 초에 작성되었다. 2019년 5월 15일 현재 국내 대형 투자사의 투자를 받고 개봉한 걸캅스가 나와서, 당시보단 덜 아쉬운 기분이다. 이제 시작이지만.)

내가 보지 않는다고 단언한 ‘한국영화’는 이런 식이다. 메인 주인공 대부분이 남성이다. 이들은 (사회가 부여한, 막상 남성들은 동의 안 할지도 모르는) ‘남성성’을 드러내면서 폭력적이고 단순한 방법으로 자기만의 투쟁을 이어나간다. 주인공이 4~5명 된다 치면 포스터상 2번째 혹은 4번째 슬롯에 여성인 배우가 한 명 있다. 이 배우의 역할은 대략, 몸매 쩔고 미모 쩌는 여성으로서 강직하고 호전적인 주인공 남성의 마음을 흔드는 유일한 존재로 그려진다. 가끔은 그 여성이 능력자일 때도 있지만, 그 능력은 (사회가 부여한, 막상 여성들은 동의 안 할지도 모르는) ‘여성성’을 이용한 것인 경우가 많다. 타짜 정마담이 그랬고 리얼의 송유화(설리)도 그랬다. 타짜 정마담과 리얼의 송유화는 급이 다르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겠으나 감독이 작품 전체에서 의도한 역할은 거기서 거기였던 것 같다. 아, 매드맥스 다음으로 많이 본 영화가 타짜고, 그토록 많이 본 이유가 정마담 김혜수였던 나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빡치는 부분이다. 정마담이 정말 거기서 파란 빤쓰 내렸어야 했나요? 결정적인 순간에 멘탈이 무너져서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하고 덜덜 떨며 소리치고, 막판에 총도 못 쏘면서 나약하게 서가지곤 ‘쏠 수 있어!’나 말하는 게, 그 지옥 같은 바닥에서 영민하게 살아남은 여자가 할 법한 행동이었을까? 정마담 덕후인 나로서는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그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했더라도, 막판에 멘탈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건 연관성이 없는데. 여자가 난다 긴다 해봤자 거기까지라는 건가.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블랙팬서의 오코예는 참으로 훌륭했다. 극적인 상황에서 남친이 ‘넌 사랑하는 남자를 죽이지 못할 거야. 난 알아.’ 했을 때 ‘(장군으로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일 수 있지.’를 말하는 그런 까리함! 이놈아, 나 같아도 빡쳐서 그랬겠다. 니 여친이기 이전에 장군인데, 거기다 대고 ‘너는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절대 프로답지 못할걸?’ 했으면 어떤 여자든 그 자리에서 목을 딴다고요. 일단 니가 지금 우리의 애정을 나의 업무(?) 방해에 이용하고 있고, 너와 나의 연애관계를 내 프로정신 후려치는 데 사용한다면 그거는 매를 부르는 거지. 여친보다 싸움도 못 하면서 그런 무모한 짓을 왜 해.

어쨌거나 다시 매드맥스로 돌아와서 (술 먹고 리뷰를 쓰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구나.) 매드맥스가 그린 여성들은 한국 영화에서와 정반대의 양상을 보인다는 게 굉장히 재미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언젠가부터 한국 영화를 보지 않기 시작한 이유는, 한국영화에 남자만 나오는 게 단순히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불편하기 때문이다. 내 돈 주고 소듕한 주말 써가매 공감이 1도 안 가는 그런 걸 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드맥스의 여성들은 보기 상당히 편하다. 내 주변 여성들과 현실적으로 상당히 닮아있기 때문에.

그건 퓨리오사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럴 리가 있어요? 퓨리오사 같은 여자가 주변에 널렸을 리가 있나. ‘팔도 없는 여성이 너무 까리하게 몸집 두 배인 남성이랑 싸우잖아요~ 퓨리오사 언니 존멋탱!’ 같은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퓨리오사가 너무 예외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한다면, 스플렌디드와 나머지 브리더들을 보자. 이들은 모임 자체가 독특한데, 각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서 시타델을 떠난 인물들이다. 솔직히 브리더 정도 되면 시타델 꼭대기에서 삼다수보다 좋은 물과 유기농 채소 먹으면서 호의호식할 수 있다. 어차피 자유연애 자유결혼이 보편적이지 않은 시타델에서 실제로 내가 원하던 남자와 눈누난나 연애하고 복세편살 하는 걸 기대하기 어렵다 친다면, 시타델 주민 기준에서 브리더는 선망할 만한 삶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들은 박차고 나간다. 왜? 벽에 스프레이로 칠해가며 외쳤듯 <우리는 물건이 아니니까>. 그리고 <이모탄이 세상을 죽인 범죄자>라는 걸 아니까. 죽으면 죽었지, 너랑 안 산다. 너랑 섹스 안 한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들의 초록 땅으로 갈 거야. 그 와중에 죽으면 어쩔 수 없고.

영화를 한 번만 봤다면, 이들이 싸움 잘하는 내 일진 친구, 퓨리오사가 있기 때문에 얘 하나를 빽으로 믿고 시타델을 탈출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맥스와 브리더들이 처음 만난 장면을 다시 복기해보면 느낄 수 있다.

워릭을 세우고 몸을 씻는 브리더들 앞에 맥스가 나타난다. 총을 들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워보이 하나를 땅에 내리꽂고, 얼굴에 희한한 창살 같은 걸 단 데다 혈액이 선명한 주사줄은 워보이와 연결돼있다. 그것만 봐도 기괴해 죽겠는데 총까지 들고 있다. 뭐여 반칙왕.

브리더들은 당연히 기겁한다. 두려워도 한다. 하지만 누구 하나 ‘야 어떡해?’ 한다거나, 친구 뒤에 숨거나, 꺅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두려움이 가득찬 눈일지언정 그 눈은 모두 맥스의 눈을 향할 뿐, 일행 중 누구에게 해결을 갈구하지 않는다. (에이 걔네가 언제 그랬어 싶으신 분들, 꼭 이 참에 다시 보시기 바란다. #영업왕) 물론 ‘이 미친놈 뭐야, 무서워 죽겠네. 어떡하지?’ 생각하지만 그게 누군가의 그늘에서 하는 생각은 아니다. 당당하게 앞을 보고 이야기한다. 다음 순간, 맥스가 물을 달라고 한다. 퓨리오사는 자기가 아무리 쌈짱이어도 ‘야 니네 짜져 있어 내가 처리할게’ 하지 않고, 스플렌디드도 ‘야, 나 이렇게 말랐고 임신도 했고 싸움도 못 하는데 어떡해, 니가 가’ 하지 않는다. 증오와 두려움에 찬 스플렌디드는 물 호스를 맥스에게 건네고 그를 경계하면서 지켜본다. 다음 순간, 뺀치로 사슬을 끊어달라고 다른 브리더에게 요청했을 때 그 역시 도망치지 않고 두려움 속에서 앞으로 걸어 나간다. 가뜩이나 무서워 죽겠는데 주변도 살핀다. 그러면서 스플렌디드에게 이야기하는 여유도 보인다. ‘저 멀리 보이는 거 저거, 모래바람이야 뭐야?’

사슬을 끊는 중에 맥스가 움직이기 곤란해지자 퓨리오사는 곧바로 맥스를 공격한다. 친구가 남성 한 명을 줘 패면서 내 친구가 죽나 쟤가 죽나 모르겠는 험악한 순간에도 누구 하나 소리 지르거나 ‘으앙 나 어떡해’ 하고 놀란 내 맘 케어해달라고 징징대지 않는다. 오히려 당장 반격하면 자신들을 죽일 수도 있는 맥스의 사슬을 잡고 끈다. 언니들 무장 하나 안 돼있는데,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 완력 있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결코 없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물러서지 않고 자신이 할 일을 한다. 이 씬에서 공통적으로 알 수 있는 정서는 하나다. 두려운 건 두려운 거다. 그들은 딱히 쿨하지 않으며 여전히 무서워한다. 하지만 도망을 쳤으면 쳤지 그 현장 돌아가는 걸 목격한 이상 그것을 ‘타인의 싸움’으로 만들지 않는다. 근력이 없든 무기가 없든,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살아남으려고 한다. 사람이 진짜 위기에 처하면 원래 그렇게 되듯이.

다음 순간, 친구가 엎어져서 죽을 위기에 놓였거나 말거나, 스플렌디드는 어머니의 초록 땅에 가겠다고 돌아선다. 이 언니 되게 냉정하다. 만약 그 놈의 ‘여성성’을 지들 맘대로 정의하고 거기에 목매는 다른 영화였다면 여기서 임산부인 스플렌디드가 그대로 돌아서는 설정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퓨리오사, 널 두고 내가 어딜 가겠니. 맥스 이 새끼야 우리 퓨리오사 왜 때렸어! 너 죽고 나 죽자! 우리 퓨리오사 털끝 하나라도 건들면 피가 거꾸로 솟아! 퓨리오사! 피가 솟아!’ (...) 해가며 이 여성이 가진 연민과 동정심, 거기서 오는 멘붕과 처절함을 그렸을 것이다. 왜냐면 그게 한국 사회에서 임산부 여성에게 갖는 시선이니까. 임신을 했다고 해도 각 개인은 굉장히 다면적이고 입체적이 존재지만 영화에서 여성+임신이란 건 모성을 가진 평면적인 존재로만 소비되기 때문이다. 스플렌디드는 임신을 했어도 스플렌디드다. 임산부라는 이름 아래 스플렌디드가 가진 성격적 특성이 지워지는 게 아니다. 스플렌디드가 아이를 지키기 위한 모성본능으로 전진한 건 아닐까 의심할 수 있지만 다음 장면들을 보면 그것도 틀렸다. 워보이 혼낼 때 제일 나대고, 위기상황에 놓였을 때 조수석 문 열고 아슬아슬하게 매달릴 줄도 안다. 스플렌디드는 용감하고 자립적인 여성이며, 그저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아군에 해당하는 모든 구성원(퓨리오사, 맥스, 무장할매즈, 브리더들)은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고 있고 거기에 다른 사람을 무리하게 끌고 가거나 대의에 의지해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건 뒤에 차차 이야기해볼 테니 일단 여기까지만.

스플렌디드가 돌아서서 걷다가 맥스의 총을 맞는다. 스플렌디드는 아프다고 엎어져 우는 대신 다시 눈을 희번덕하게 뜨고 읊조린다. ‘어머니의 땅에 갈 거야.’ 그녀들의 여정이 탈출이나 도망이 아닌 욕망에 기반했다는 게 여기서 또렷하게 드러난다. 종아리에 총 맞은 거 알겠고, 아파 죽겠지만 나는 갈 길 가야 해. 퓨리오사도 거기서 ‘오구오구 우리 고생 한 번 안 해본 스플렌디드 총 처음 맞았쪄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동료다. 아프냐? '여기선 뭐든 전래 아파. 죽기 싫으면 일단 뭐든 집어들고 뛰어.' 그러고 다함께 냅다 뛴다. 안 뛰면 죽을 판에 우쭈쭈고 나발이고. 그런데 이 설정이 오바같은가? 아니. 실제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러고 산다.

다음 순간, 맥스가 워릭을 끌고 튀다가 자동제어 설정 때문에 멈춘다. 퓨리오사는 그거 나 아니면 어차피 못 몬다고 한다. 그러나 맥스는 혼자 떠나고 싶어한다. 이 때도 퓨리오사는 나약함이나 동정심에 기대지 않는다. 만약 한국영화였다면? 스플렌디드는 이미 웨이브 한 판 하고 하다못해 귀요미송이라도 부르거나 이도 저도 안 되면 히치하이킹이라도 하려고 진작에 허벅지 걷었다. 하늘하늘한 붕대 같은 옷만 걸친 채 탈출한 여자 여러 명이 있는데 그런 설정 왜 못하겠어. 최소한 퓨리오사도 이 정도 대사는 할 것이다. ‘야, 그럼 이 여자애들 다 어떡하냐. 길바닥에 죽게 놔둬? 넌 동정심도 없어? 무슨 남자가 그래?’ 그러나 매드맥스의 퓨리오사는 그 대신 논리적인 설명을 한다. 니가 끌려는 워릭이 몇 마력짜리, 얼마나 대단한 병기인지, 그리고 네놈이 내 상사 와이프 종아리에 총 쏜 마당에 현실적으로 니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지, 그리고 끝내기 홈런으로 이런 말도 한다. ‘너 얼굴에 그거 빼고 싶지 않냐?’ 거의 외교특사 수준이다. 협박과 회유, 설득과 오퍼를 다 한다. 잘한다 퓨리오사, 똑똑하다 우리 퓨리오사. 실제로 내가 일하면서 만난 대부분의 여성이 이렇게 산다. 잉잉 저 여잔데 어떡해요, 이대로 날 두고 갈꼬야? 저 여잔데 이만하면 잘한 거 아니예용? 그냥 봐주세요~ 하는 여성은 한국영화에서밖에 못 봤다. 실제 삶에서 만나는 여성들은 대부분이 이렇다. ‘저는 상관없는데, 이렇게 가는 게 정말 맞아요? 저는 하라면 할 수 있어요. 근데 이게 조직에 도움이 안 되는 선택 같은데 어떠세요?’ 한다. 문제는 많은 상사들이 그 논리가 타당해서 주장을 굽히고도, ‘어휴, 여자애들은 징징대고 말이 많아. 그냥 좀 하지.’ 같은 소릴 한다는 것이다. 퓨리오사가 워릭 되찾은 것도 여자애들이 징징대서 어쩔 수 없이 전투차량 그까이 거 줬다고 할 양반들아. #말이야방구야

맥스가 차에 있는 모든 총을 가방에 압수하려고 손가락 스냅을 할 때, 각각 의견이 갈리지만 누구 하나 ‘나 어떡해야 돼?’ 하지 않는다. 알아서들 한다. 쟤가 주란다고 줄 필요 없다는 애, 선택권이 없는데 뭐 어쩔 거여 하는 애, 집어서 조용히 건네주는 애, 그 와중에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하는 애 등 다양하다. 특히 맥스가 시야 돌릴 때 인질 삼으려고 브리더 중 한 명의 멱살을 잡아서 얼굴로 당길 때 1초도 쫄지 않는 그 언니 대사가 예술이다. “상품에 손상 안 입히는 게 좋을 거다.” 세상에나.

이후로도 브리더들은 각자 주관에 따라 그때 그때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내가 뭐 싸우는 법 안 배워서 모르지 못해서 안 하는 것 같냐는 듯이, 가방에서 깨알같이 인벤토리 체크하는 언니 있고, 뒤에 위험한 놈들 오나 망보겠다고 다짜고짜 나가는 언니 있다. 퓨리오사도 그걸 딱히 제재하지 않는다. 다 큰 여자애가 지가 할 수 있다는데 냅두지 어쩔 거여 하면서. 그래서 보기 편하다. 제한된 상황들이 있어도 각자 알아서들 살아남는 현실 여성들과 매드맥스의 브리더들이 상당히 닮아있기 때문이다. 누구 하나 한국영화에서 그리는 여성상처럼 앞뒤 안 가리고 나만 보호해주길 바라고 위기상황에서 사회가 정의 내린 여성성을 이용해먹지 않는다. 한국영화뿐만 아니라 전 세계 영화에서 여성을 소비하는 대표적인 방식인, ‘중요한 순간에 초 치는 멍청한 여자애 역할’도 하지 않는다. 아, 브리더 중 한 명이 결정적인 순간에 총알 장전에 실패하기는 한다. 근데 솔직히 여러분 그거는, 평생 브리더로 살던 애가 총 형태 이해하고 인벤토리 체크한 것만으로도 미라클 아니에요? 그건 예외로 쳐야지요.

갑자기 멀리 가는 것 같지만, 여기서 내가 얻는 편안함은 박근혜의 공판 과정을 보던 불편함과 일맥상통한다. 사라진 7시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여성의 사생활이다’ 운운하던 부분, 그리고 공판을 앞둔 과정에서 ‘여성으로서의 고충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하던 부분. 평생을 여성의 생존 고통을 알지 못하고 살았던 그 여성은 그 두 마디로 치열하게 살아온 한국의 여성들을 크게 좌절시켰다. 현장에서 아무리 동등하게 경쟁하려 노력하고 자기 몫을 다하면서 ‘여성도 할 수 있다.’를 증명하려던 수많은 여자들을, 박근혜는 그렇게 쉬운 몇 마디로 주저앉혔다. (너 때문에 여성 인권이 50년쯤 퇴보했다 by Glee) 근력도 없고 앞길도 막막하지만 자기 살 길을 당당하게 찾고 싶었던 한국의 브리더와 퓨리오사들은 그렇게 좌절했다. 이거에 더 분노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여성을 비하할 때 이용되던, 막상 현실에 없는 여성상과 너무 비슷한 소리였기 때문이다. 아, 참고로 현실에 없는데 여성들을 싸잡아 비난할 때 쓰는 용어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명품백 사 달라는 된장녀’ 같은 거. 주변 남자애들이 농담처럼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한 번씩 물어본다. “정말로, 몇 백 하는 명품백을 사달라던 여자 친구 만나봤어? 그래서 너는 사줬어?” 그러면 돌아오는 말이 항상 비슷하다. “아니. 근데 그런 사람 많다잖아.” 아니 그래서 만나봤냐고요. 무슨 전설의 동물 해태 같은 소리냐고요. 물론 그런 애들을 만났다는 사람들이 등장하더라도, 사주면서 기분 좋으면 알아서들 사 주실 일이고 아니라면 말면 되는 거잖아. 사리판단  되는 다 큰 성인이 그런 비상식적인 요구에 응하고 나서 그것을 한국 여성의 특징으로 일반화해도 될 일인지? 여기서 내가 느끼는 불편함이 바로 한국영화 속 여성을 보는 기분과 맞닿아있다. 아니 살면서 만나보기 어려운 여자애들 캐릭터를 마치 인구주택총조사 해서 얻은 표본 마냥 묘사하고 있어. 너희 영화에서 그리는 여성 주변에 없다고요, 무슨 말인지 잘 공감이 안 돼서 불편하다고. 근데 그런 특수한 캐릭터가 어쩜 그렇게 수많은 영화에 등장할 수가 있어.

그래서 그런 건지, 매드맥스는 볼 때마다 항상 편하다. 여성을 묘사한 방식뿐만 아니라 관계의 모양도 상당히 편하다. 내가 선호하는 인간상과도 닮아있다. 의리, 대의, 친분 같은 걸 굳이 티 나게 강요하지 않는 것. 그때 그때 개인의 의견과 선택을 존중하는 것. 어머니의 초록 땅이 이미 폭망이란 걸 알았을 때, 퓨리오사는 맥스에게 다음 행선지로의 동행을 강요하거나 의리를 지켜달라 하는 대신 기름 채운 오토바이 하나를 내밀뿐이다. 맥스도 마찬가지다. 그 난리부르스를 추고서도 굳이 시타델 본진까지 먹고 이모탄까지 다 처리해놓고선 지가 가야겠다 싶으면 갈 길 간다. 퓨리오사는 그런 맥스를 보면서 ‘야, 여기까지 와서 갑자기 발 빼면 우린 어떡해.’ 같은 소리 안 한다. 간다는데 어쩔 거여, 하면서 눈인사를 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는 사람 안 잡고 오는 사람 안 막고. 쓸데없이 의리입네 대의입네 우정입네 하면서 서로를 말로 구속하거나 감정적으로 종속시키려 들지 않고 히스토리야 어찌 되었든 그 때 그 때 하는 개인의 선택을 있는 그대로, 조금은 회의적인 자세로 존중하는 일. 이거 완전 유토피아 아니야, 안 그래요?

혹자는 매드맥스의 여성 캐릭터가 매력적인 이유를 윤리적이고 정의롭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성의 성격을 올려치면서 ‘여자들이 원래 좀 도덕적이고 정의롭잖아요, 안 그래요? 여자가 주류였다면 세계 평화는 진작에 이루어졌을 것임.’ 하면서. 나는 그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사고방식이 여성을 또다시 옭아맨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은 여성의 본능이나 특징이 아니다. ‘너는 무슨 여자애가 그렇게 세심하질 못하니? 너는 무슨 여자애가 그렇게 남자애마냥 정이 없니?’ 제가 여자인 건 맞는데 말씀하신 특징은 성별이랑 상관없는데요. 정 없고 배려심 없는 게 남자의 특징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저 다같이 공감해줬으면 하는 것은 여성도 그냥 욕망에 충실한 존재이고, 생존을 위해서 있는 힘껏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런 맥락에서 매드맥스는 내 주변에 존재하는 보통의 여성들과 가장 흡사한 영화다. 그리고 당연히, 주변의 많은 남성들과 흡사하기도 하다. 사람이 대체적으로 그렇지. 퓨리오사처럼 워보이로 자라나 모든 것에 반격하는가 하면, 브리더로 자라나서 기본적인 근력이나 전투력이 딸리더라도 각자의 방식으로 물러서지 않고 자신만의 투쟁을 할 수 있다는 거다.

비행기에서 3n차 매드맥스를 찍으면서, 매맥뽕에 취해 몇 자(...) 적었다. 감동적이어서 이거 원 또 봐야지 안 되겠다. 나는 매드맥스 같은 영화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좋아서 몇 번 볼 수야 있겠다만 이렇게 매번 다른 감동을 안길 영화가 몇 개나 될 거야. 살면서 한 번도 그런 영화 못 갖는 사람도 분명 있을걸? 영상미, 캐스팅, 대사, 연출, 사상까지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볼매 영화, 매드맥스.

쓰다 보니 A4 6장을 넘어갔다. 덕후들은 왜 이렇게 이성이 없고 정도를 모르나 모르겠다.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싶어 스크롤을 내리셨어도 괜찮다. 봐주기만 하면 괜찮다, 아니 진짜, 제발요. 매드맥스 아직 안 본 사람 없게 해 주세요, 진짜로. 길게 쓴 거는 제가 잘못했어요, 그냥 한 번만 봐주세요. #영업왕

2018. 4. 이탈리아행 비행기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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