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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지 Nov 27. 2019

내일은 한 꼬집이라도 더 행복해지자

일단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언제였더라. 거나하게 취한 친구는 내게 "난 남자동료랑 똑같이 야근하고 경쟁해서 버텼는데? 애 챙기면서 일해야 한다고 징징대고 싶지 않아"라고 했다. 순간 정말 많은 고민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말하고 싶었다. 너는 '똑같이' 경쟁한 적 없다고.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아프면 너에게만 전화가 오고, 하원한 아이를 먹이고 씻긴 후 부스스 일어나 노트북을 펴서 못한 잔업을 한 후 비몽사몽간에 출근을 했다. 야근이 생기면 여기저기 전화해 아이를 봐줄 사람을 찾고서 스톱워치 돌린 듯 마음 졸이며 그 사무실에 앉아 야근하는 것은 옆자리 남자 동료와 '똑같이' 하는 게 아니라고.

위의 모든 에피소드를 내게 말하며 부침을 토로하고도 "그래도 난 남자동료와 똑같이 야근해서 버텼지 징징대지 않았어"라고 마무리하는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 널 평안하게 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 마지막 한 줄이 너의 지푸라기 같아서, 너무나도 부당한 저 말이.

그 말을 여자 후배 앞에서도 해서 그들을 좌절시킬까 걱정스럽다. 애초에 너의 자리에 탈락한 수많은 여성 앞에서도 하게 될까 걱정스럽다. 직경이 다른 바늘구멍을 통과한 남자동료 앞에서 말해 그들의 비틀린 세계관이 공고해질까 우려스럽다. 하지만 너의 세계도 함부로 상처 내고 싶지 않아.

너는 너의 투쟁을 하는 중이니까. 내가 감히 거기서 너의 말을 일일이 정정하는 것은 공감도 현실감도 없이 내 선민의식에 취한 빻은 계몽이나 마찬가지니까. 어떤 식으로든 너의 삶이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을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안겨줄 수 있을까?

약자들이 잔다르크가 되어야 우리의 세상이 바뀐다는 게 한숨이 난다. 약자는 약자라서 이미 지쳐있고 동력이 부족한데. 살아남으려고 카페인처럼 행복회로도 돌리고 정신승리도 해야 하는 동지들이 다 마음 아프다.

다음에 만나면 일단은 살아남자고 말해야지. 어떤 식으로든 그래도 살아남자고, 그리고 내일은 한 뼘 아니 한 꼬집이라도 더 행복해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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