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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종관 Sep 06. 2024

빛 열

  드물게 선명하게 카메라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는 뒤란의 장독대에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달을 향해 치성을 드리고 있다. 어린 나는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모으는 어머니를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는 왜 그 시절을 또렷이 기억할까. 동그란 달님은 공중에 둥실 떠 있고 어머니는 수없이 머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 누나들은 어머니가 달님을 향해 소원을 비는 것이라고 했다. 멀리 있는 형은 어머니가 드리는 치성의 음덕을 받았을까. 정월 대보름날 달집을 태우던 기억은 더욱 선명하다. 동네 아이들은 논두렁 밭두렁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쥐불놀이를 하는데 어머니는 발갛게 타오르는 달집 앞에서 두 손을 비비며 허리를 굽혀 끝없는 절을 올렸다. 비실비실 연기를 피워 올리던 달집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기 시작하면 불길은 하늘 높이 솟아올라 둥그런 달에 옮겨 붙기라도 할 듯 맹렬한 기세로 타올랐다. 불길이 타오름과 동시에 불 붙은 짚에서 솟아오른 불씨들이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불씨들은 어두운 하늘에 떠 있는 달에게 긴히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숱하게 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싣고 달을 향해 뛰어오르는 불씨들은 허공에서 광란의 춤을 추었다. 나는 불씨들의 군무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지만 어머니는 불꽃을 향해 절을 올리고 있었다. 열기를 내뿜는 불기둥이 마치 살아 있는 두려운 대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어머니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불씨들은 높이 뛰어 올라 하늘을 가득 메웠다. 달빛의 동그란 품 안에서 제멋대로 춤을 추는 불씨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어딘가를 향해 맹렬히 달음박질쳤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재가 되어 어둠 속에 흩어졌다. 불씨들의 생명은 겨우 몇 초에 지나지 않았고 덧없는 춤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어머니의 치성은 달집이 다 타버리고 재만 남아도 끝나지 않았다. 카메라의 기억은 나에게서 떠나 어머니의 상념으로 옮아갔다. 그날, 달님을 향해 간절히 빌었던 것은 넷이나 되는 아이들의 온전함과 보잘 것 없는 집안의 무사안녕이었다. 그거 말고 달리 무슨 바람이 있겠는가. 달집은 실성한 사람의 머리칼처럼 타오르고 시뻘겋게 타는 불길이 무서워 눈을 감고 달을 향해 빌고 또 빌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무주공천 두렷이 떠 있는 달님께 비나이다…먼 길 떠나 있는 자식을 보살펴 주소서…아직 어린 아이 먼 길 떠나 있는 데 밥이나 제 때 먹는지 못난 어미 알지 못하나이다. 굽어 살피소서. 아이가 굶지 않도록 해 주시고 낯선 길에 혼자 헤매지 않게 도와주소서…부디 순하게 자라게 도와주시고 어두운 진창에 빠지지 않게 보살피소서. 나쁜 기운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도와 주시고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도와주소서…집에 있는 어린 것들을 보살피시고 근심 많은 남편을 살펴 주소서…평생 일밖에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소서…남편이 떠나 있는 아이 때문에 너무 상심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그 아이 때문에 걱정이 많아 몸이 상할까 두렵나이다…비나이다, 비나이다…’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빌고 또 빌면 소원이 이루어질런지 정신이 아득한데, 불씨들이 날아올라 정신 없이 나부낄 때 몸에서 힘이 다 빠져 나가고 내 소원보다 더 센 바람이 불길을 치 올려 달을 향해 올라가면 나는 차라리 귀 먹고 눈 멀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허공에 뛰어 올랐다가 식어서 내려오는 재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바보천치가 되어 한 세상 끝에 머무르고 싶었다.       


  심야의 카메라는 두서 없는 기억 속에서 길을 잃는다. 달집 앞의 어머니는 뒤틀리기만 하는 세상이 미워서 화가 나기도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달님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모든 게 운명 같지만 운명이 가는 길조차 불길에 휩싸여 공중에 흩어지고 만다. 혼잡한 기억 속에서 친구들에게 피투성이 되도록 맞은 아이는 은행에 도장을 찍으러 가자고 조르고 발이 빠지는 논에서 신발을 잃어버린 남편은 달을 향해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갓난아이가 젖을 달라고 울어서 떼어 놓고 갈 수가 없다. 그런 일들이 하룻밤에 일어난 것 같기도 하고 한 평생이 걸린 것 같기도 하다. 불타는 화염에 대고 절을 하면 불씨가 달에 옮겨 붙어 온통 불바다가 되다가도 문득 온 세상이 텅 비어 캄캄한 어둠 뿐이다. 어두운 밤길을 아이 혼자 헤매는 게 걱정되어 마당에 불을 피우면 불은 금방 커지고 불씨들은 공중에 뛰어 오른다. 불씨는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작은 물고기 같기도 하고 혼자 몸부림치는 아이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다. 어머니는 무섭고 두려워 끝없이 절을 올리는데 불씨들은 떼로 몰려 다니며 가여운 아이를 발로 차기도 한다. 아버지 모습이 시뻘건 불길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논을 보러 간 아버지는 잘 마른 벼이삭에 불이 붙어 논이 다 탄다고 소리 지르며 불구덩 속으로 뛰어든다. 가지 말라고 소리치지만 아버지의 옷자락 하나까지 죄다 불이 붙어 숨이 멎을 때까지 불길은 꺼지지 않는다. 통곡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아 탈진하여 쓰러지면 재가 되어 내리는 불씨가 아버지 무덤에 눈처럼 내린다. 노쇠한 어머니는 밤마다 꿈 속에서 달집을 태운다. 불씨들은 한껏 뛰어올라 카메라 앞에 솟구친다. 꿈과 생시의 구분이 흐릿해진 어머니의 마당은 혼곤한 상념에 부대끼다가 힘을 잃고 가라 앉는다. 한평생을 살았지만 밤마다 다시 시작되는 고난의 세월을 카메라는 어떻게 보여 주어야 할까. 그것은 허망한 꿈에 불과하지만 생시보다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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