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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은 맑게 개었다. 비에 씻긴 듯한 맑은 하늘이 동쪽에서부터 밝아오고 있었다. 간밤에 비에 젖어 잠자리에 든 노인의 안부가 궁금하여 일찍 마당으로 나가 보았다. 간병인 여인의 차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주차장 한쪽에 그녀의 빨간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노인의 집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날이 밝기는 했지만 아직 집안에는 불을 켜야 할 정도로 어둠이 남아 있었다. 간병인이 도착했다면 노인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어야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자동차의 앞 유리 위에는 아침 이슬이 맺혀 있었다. 보닛 위에 손을 대보니 전혀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자동차는 밤새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던 것 같았다. 간병인은 무엇을 타고 돌아간 것인가. 차에 문제가 있어서 버스라도 타고 간 것일까. 잡다한 의문이 들었지만 당장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수선을 피울 일도 아니어서 카페에서 차를 만들어 마시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커피를 내려서 잔을 들고 마당의 나무 마루에 나와 앉아서 숲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었다. 밤나무 숲을 스쳐 지나온 바람이 잠기운이 남아 있는 머리를 맑게 씻어 주었다. 명사장의 숙소에서 사람이 나오는 기척이 들렸다. 그의 숙소인 펜션 건물은 카페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 과거에 장사의 편의를 위해서 가까운 곳에 잠자리를 정한 것이리라. 하얀 출입문이 열리고 담배를 피워 문 명사장이 나오기를 기대했던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명사장이 아니라 간병인 여인이었다. 그녀는 꾸미지 않은 어수선한 차림으로 익숙한 듯 문을 열고 나와서 노인의 집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내가 카페 마루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갑자기 나타난 사람의 존재에 조금 놀란 듯했지만 이어 별 일 아니라는 듯 시선을 거두어 나를 외면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인사를 해야 하나 망설였지만 여인이 대수롭지 않게 자기 볼일을 보러 가버리자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여인은 아침 일찍 도착하여 명사장의 살림도 도와주는 것인가. 불편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걸 물리치기 위하여 나름대로 추리를 해 보았지만 사실이 어떤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노인의 집 문이 열리고 소리가 들리고 노인의 방에 형광등 불빛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간밤에 별 일 없이 잘 잤다면 노인은 옷을 갈아입고 아침식사를 하게 되리라. 오전 일과가 끝나면 여인은 돌아갈 것이고 노인은 숙소를 벗어나는 일 없이 집안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리라. 명사장은 늦도록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늦잠을 자는 게 일상이 되었는지 오전 시간에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나는 궁금증을 갖지 않기로 했다. 간병인이 노인에게 갔다면 노인의 일상은 별일이 없을 것이고 그 외에 내가 관심 가져야 할 일은 없었다. 간밤에 비를 맞고 서 있던 노인은 정상이 아니었고 환자인 그의 행동은 이해 못 할 바가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일들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런 일들을 알게 되는 것이 성가시게 느껴졌다. 나와 무관한 일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상큼한 초여름의 아침 기운 속에서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커피 향을 음미하는 게 나에게는 더 중요한 일처럼 느껴졌다.
둘이 와서 커피를 마시고 갔던 커풀은 얼마 뒤 다시 찾아왔다. 그들은 이미 카페의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나를 보고 알은체를 하며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커피를 만들어 내 오는 게 조금 성가시기는 했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커피 두 잔을 내 가고 그들이 탁자 위에 놓고 간 지폐 한 장을 명사장이 핀을 꼽아 놓은 자리에 더해서 꼽아 놓았다. 그들은 둘이 마주 앉아서 즐거운 듯 머물다 갔다. 나는 그들이 차를 마시는 동안 실내에 들어와 잡다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남자는 내가 일하는 곳까지 들어와 잘 마셨다는 인사를 하고 갔다. 나는 가벼운 인사로 응대했지만 장사하는 사람 흉내를 내기는 싫었다. 그들도 그런 사정을 이해하는 지 짧은 인사를 건네고는 이내 사라졌다. 이후 그들은 가끔 찾아와서 차를 마시고 갔다. 나는 주방의 형편이 닿는 대로 그들을 대접했다. 커피가 떨어진 날에는 아무것도 줄 수 없었는데 그들은 불만 없이 돌아갔다. 그 날 남자는 나에게 다가와 혹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러 오고 싶은데 예약을 해서 오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혹시 모르니 미리 전화를 달라고 했다. 남자는 오래 있지 않고 최대한 사장님의 형편에 맞게 놀다 갈 테니 부탁을 한다고 당부를 하며 떠나갔다. 나는 남자의 부탁을 한 마디로 거절하지 않았다. 장사를 해야겠다는 다짐이 선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곳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별 일이 없다면 이대로 시간이 흘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다. 명덕천 계곡에 들어설 때부터 근거를 알 수 없는 충만한 감각이 나를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소박하고 조용한 자연이 주는 위안 때문이었다. 나는 단조로운 만족감에 내 몸을 맡기고 있었다. 제멋대로 굽어 자라는 나무들이 그러듯이 나도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평화로운 삶을 이어가고 싶었다. 내가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녁 파티 자리를 부탁하는 남자의 요청은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조금은 일을 해도 될 것 같았다. 부담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먹을 양식을 구할 돈을 벌어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민에게 나의 생각을 물어보기로 했다.
이 곳 생활이 마음에 들기는 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전원생활을 즐겼다. 잠을 즐기는 그였지만 충분히 수면을 취하고 난 정오 쯤, 그는 혼자만의 산책을 즐겼다. 그가 산책을 나가는 모습은 비행기가 이륙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면 그는 마당에 있는 개에게 가 겅중거리는 개를 데리고 장난을 치며 놀았다. 그러다가 개 놀이가 싱거워질 때 쯤 노래를 부르며 마당과 밤나무 숲을 들락거리며 걷기 운동 비슷한 걸 했다. 한동안 자갈 밟는 소리가 들리고 밤나무 숲 속에서 혼자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리다가 이윽고 이륙할 때가 된 비행기처럼 양팔을 벌리고 출입구 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가 왜 팔을 벌리고 언덕을 달려 내려가는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 둥그스름한 그의 몸이 짧은 팔을 양쪽으로 벌리고 달려가는 것은 아마도 무거운 몸을 버리고 새처럼 가벼워지고 싶기 때문일 거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그에게 물으면 물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는 아이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고 복잡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낮은 고도를 유지하며 날아오른 그는 오후 늦게 돌아왔다. 어디를 갔었냐 물으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고 한다. 재미난 일이라도 있었냐 물으면 특별히 재미난 건 없었고 동네 아저씨들과 놀다 왔다고 한다. 그는 오전에 나갈 때보다 기분이 들떠서 돌아오곤 했는데 번번이 막걸리 냄새가 나는 트림을 해대고는 했다. 시키지도 않은 수다를 마구 떨어대는 그의 얼굴을 보면 공짜 술을 얻어 마시고 들어왔음이 틀림없었다. 카페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을 회관이 있었다. 민의 산책 비행은 이곳에 자주 머물렀다. 바깥 활동하기에 적당한 초여름의 날씨라 회관에는 마실 오는 노인들이 두세 명 있었다. 민은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사교성이 좋다기보다는 성격이 온순한 그는 회관 앞에 앉아 있는 노인들에게 다가가 두서없는 말동무가 되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구멍가게가 있어서 노인 중 하나가 막걸리라도 가져 오면 분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이동막걸리 진짜 맛있다.”
막걸리 냄새를 풍기며 돌아오는 날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 막걸리는 그의 생활의 낙이 되었다. 술안주는 구멍가게에서 얻어온 깍두기 한 종지일 때가 많았지만 그는 노인들과 막걸리 모임을 즐기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는 돈을 조금 달라고 했다. 매일 얻어먹기가 미안하니 자신도 한 잔 사야할 때가 됐다고 했다. ‘안주를 좀 만들어주랴’ 물었더니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고 더구나 막걸리 안주는 구멍가게 깍두기가 최고라고 했다. 어느 날인가는 민이 마을회관에서 귀신 소식을 물고 왔다. 카페 앞 개울 건너에 폐가가 있는데 그곳에 귀신이 나온다는 것이다. 폐가는 카페 마당에서 지붕 모서리가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밤나무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잿빛 지붕 모서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민이 마을회관에 자주 머물다보니 마을 사람들과도 안면을 트게 되었고 마을 이장님과도 아는 사이가 되었다. 중년의 이장은 지나가는 길에 막걸리를 한 잔 얻어먹고 논으로 밭으로 바쁘게 다니는 사람이었다. 작은 마을이라 이장이 바쁠 일은 없어보였지만 마을회관에 노인들이 머물고 있으므로 자주 들르는 편이었다. 민은 노인들의 소개로 카페청년이란 이름으로 낙점되었고 막걸리를 매개 삼아 쉽게 친한 사이가 되었다. 노인들이 미처 알리지 못한 소문을 마을이장은 잊지 않고 들려주었다. 폐가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도 이장의 입을 통해서였다. 귀신은 젊은 여자다. 그 집에서 남자 때문에 원한이 맺힌 여자가 자살을 했는데 그 이후 귀신이 나온다.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간략한 설명이 귀신 출몰 소문의 전말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자주 보인다는 설명이 사족처럼 붙어 있었다.
“가볼까?”
“언제?”
“비 오는 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귀신의 존재를 확인해보기 했다. 숙취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흐리멍덩한 상태로 있던 구는 재미있겠다는 표정으로 꼭 한 번 가보자고 명토를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