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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angsungaa Oct 29. 2020

대출, 영끌 어디까지 해봤니

비트코인 그게 뭔데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지만 공무원이라는 꼬리표는 내가 외부 경제활동을 하는 것에 엄청난 제약이었다. 술만 퍼마시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요즘 힘든 일이 있냐고 물어보는 여자친구의 질문도, 데이트 비용에 예민해지기 시작하는 나의 모습도 모두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사실상 악순환이었다. 집안이 암울하니 술이 땡기고, 술은 먹으면서 데이트에는 인색해지고, 인색해지니 무슨 일이 있냐며 물어보면서 또 스트레스를 받고... 또 술이 땡기고?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세상을 바꿀 거라며?

치기 어린 지식인 코스프레와 허세 가득한 도련님 행세의 끝은 깜깜한 바닥이었다.


삼각지 국방부 후문을 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평소 같으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탔어야 했지만, 그 날은 그냥 걷고 싶었다. 같은 과 조종사 형(삼촌?)을 졸라서 받은 공군 신형 조종화는 걷기에 딱이었다. 우스웠다. 세상이 다 무너져 내리는데 나는 고작 신발이 바뀌어서 편하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인간이란 참 순간에 약한 동물이구나 싶어 쓴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수십 번이고 답을 내려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내가 비상금으로 엄마가 숨겨놓은 돈을 가지고 투자를 한들... 먹구름을 걷어낼 수 있을 만큼 투자의 귀재일까? 아닐걸. 만약 진짜 다 날리면 난 결혼은 할 수 있을까? 엄빠가 평생 모은 돈으로 산 집을 팔아서라도 결혼하나? 전역은 까마득한데 취업한들 내가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하지?


질문이 질문의 꼬리를 물고 삼각지부터 한강진까지 걷는 나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가족 카톡방엔 엄마가 “아들 집에서 저녁 먹어?”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나는 “ㅇㅇ”이라고 짤막하게 답장을 하고 블루스퀘어 옆 벤치에 걸쳐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불현듯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이가 있었다. 나의 해군 시험 면접관이었고 추후 어학원 교관 중 한 명이었던 A. 그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걸었다.


“나 급하게 돈이 필요해.”

“돈 빌려달라고?”

“아니... 약간의 돈을 투자해서 최대의 이윤을 볼 수 있는 투자상품이 뭐가 있지? 네가 그때 술자리에서 말한 거 그거.”

“아 비트코인?”

“그거 어떻게 사냐?”


비트코인 광풍이 불기 전 폭풍전야의 시기였다. 사실 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트코인의 ㅂ자도 이해하지 못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A에게 끈질기게 질문을 해서 나는 소액의 월급을 투자해보기로 결정했다.


잠이 들기 전, 엄마에게 나의 플랜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엄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비트코인 그게 뭔데? 사기 아냐?”라고 반문했다. 자신 있게 그렇다 혹은 아니다 답변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우선 내가 소액으로 투자해보겠다 했다. 그렇게 나는 비트코인이 지금은 상상도 안될 정도로 싼 가격일 때 사서 사고팔고를 반복했다. 투자계에는 Beginner’s luck이란 말이 있다. 초짜가 투자를 하면 운이 따라준다는 뜻인데... 그렇게 나는 그 운빨로 소액의 돈을 조금이나마 불려서 그 달의 카드값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난 엄마에게 자신 있게 내역을 보여주면서 주식에 들어가 있던 돈 중 일부를 떼어달라고 했다.


거진 일주일의 씨름 끝에 난 엄마의 비상금 일부를 받아 이더리움이란 더 싼 상품(그 당시의 나는 뭐 아무것도 몰랐으니 상품이라 칭하는 게 옳다)에 투자했다. 그리고 근무는 일단 뒷전이고 거래소의 양봉과 음봉에 기분이 함께 오르락내리락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후에 가상화폐 거래가 사회적으로 광풍이라 칭할 정도가 되면서 합참의장(군 서열 1위)이 전체회의에서 거래 자제를 얘기한 이유가 아마 이 것일 테다.


내가 거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트코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슬슬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인생이 영화라고 믿는 이 우매한 결정론자는 마치 내 자신이 영화 <빅쇼트>에 나오는 마이클 베리 박사인 것처럼 느껴져서 가슴이 웅장해졌다. 내가 베팅하는 것은 하나의 상품이 아니라, 세상이라고 착각했던 것이 아마 큰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당시의 난 “세상의 돈은 가치가 떨어졌고, 암호화폐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내 투자가 암담한 집안의 미래를 바꿀 것이라 호언장담했다.


참고로 저 당시 가즈아의 뒤에 딱히 전문적인 지식은 없었다.


모든 비극의 시작은 주인공의 오만함에서 시작됨을 난 여전히 배우지 못했던 것일까? 공무원 대출까지 엄마 몰래 받아서 투자금에 보탠 나의 이더리움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더리움은 내가 출장 비행기에 오른 시점부터 떨어지면서 내가 미국 땅에 도착하자 내 거래소 잔고를 파란색 피바다로 만들었다(당시 내가 쓴 거래소는 손실이 나면 파란색으로 표시해주었다). 정신이 혼미했다. DC 공항에서 나는 계속해서 구역질이 나와 한 손으로는 트렁크를 부여잡고 계속 토했다.


당시 출장이 얼마나 중요한 출장이었냐면... 한미 정상회담 군 대표단으로 참가하는 것이었다.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처음으로 만나는 회담이기도 했다.


원래 군 대표로 가야 했을 담당자가 우리 본부장님으로 교체되면서 본부장님이 통역장교를 나로 교체해서 급작스레 떠난 출장. 미국 출장이 싫다며 관용비자를 안 받던 내가 비자가 없어 대통령 1호기를 타지 못하고 대한항공을 타고 ESTA 비자로 간 그 출장 말이다. (대통령 1호기는 정말 타보고 싶었다. 쩝.)


나의 역할은 대한민국 군을 대표하여 미 국방부와 정상회담 이후 공동 선언문에 실릴 내용들에 대한 협상을 통역하는 것이었다. 신임 본부장이셨던 그리고 이제는 육군 참모총장으로 예편하신 그는 나를 매우 아끼셨고, 온갖 전략 협상 통역에 용병으로 끌려다니던 실무자인 나를 많이 신뢰하셨다. 그런 그가 손수 픽해서 데려가는 출장인 만큼 난 최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했는데... 이더리움의 가격은 그런 로맨틱한 시나리오를 허락하지 않았다.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나는 최악의 컨디션과 최악의 멘탈이었다. 방을 같이 쓰는 국방부 소속 중령님에게 뛰고 오겠다며 나가 DC 시내를 걸으며 계속 하염없이 울다 들어가서 잠이 들곤 했다. 당시 주미 무관이었던 분은 통역장교의 영어 오류를 잘 잡아내는 미 육사 교육을 받은 이었고, 그 앞에서 나는 하염없이 입으로 똥을 쌌다. 통역을 못하면 똥을 싼다고 표현한다 더 슬펐던 것은 나한테 급한 불은 미 국방부가 아니다 보니 내 퍼포먼스에 이상이 생겼음을 인지하면서도 멘탈을 잘 부여잡질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출장을 잘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왔지만 건진 것이라곤 본부장님과의 투샷 정도였던 것 같다.


나의 영광스러운 프사로 약 1년은 우려먹었던 것 같은 투샷... 내 최악의 상태에도 믿음을 주셨기에 끝까지 임무 수행을 할 수 있었다.




공무원 대출까지 받아 올인해야 했던 절박했던 나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며 호언장담하던 나의 과거 발언들은 무너지는 집에서 기둥을 하나 더 빼간 것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렇게 우울함까지 겹치면서 최악의 나날들을 보내던 나에게 엄마는 “괜찮아질거야. 손해 봤다고 팔지 말고, 너가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면 기다려봐.”라는 명언을 남겼다. 후세는 이를 존버의 시작으로 기억할 것이다.


거짓말처럼 비트코인 광풍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모든 상황이 나아졌다. 중간중간에 계속 사고팔기를 통해 이익금을 대출 상환, 생활비, 아빠 용돈, 나의 카드비로 메워야만 하지 않았더라면 꽤나 부를 쌓았을 수 있겠지만... 그저 상황이 나아졌음에 감사한다. 모든 빚을 다 갚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급한 불들은 끌 수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정말 있다.

그 구멍을 내가 정할 수 없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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