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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angsungaa Oct 29. 2020

그는 나의 반쪽입니다만

누군가의 오른팔이 된다는 것

그를 처음 만난 건 미래 어쩌고 태스크포스 팀에 파견을 갔을 때였다.


줄여서 미래 TF라 불리던 그 팀은 소위 잘 나간다는 영관급 장교(중간관리자 직책이라 생각하면 편하다)들로만 구성되었다. 그래서인지 사무실 분위기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사람들이 매우 따뜻했고 예의발랐다. 내가 속해있던 과와 사뭇 달랐다.


처음 내가 군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의 과장은 자신이 아침 수영을 하기 때문에 등이 건조하다며 나보고 바디로션을 발라달라 했었다. 그리고 통역장교는 외국물을 먹어 싸가지가 없기 때문에 기초부터 가르쳐야 한다며 구두를 닦게 시키기도 했다. 당연히 호칭은 “야”로 굳어졌고, 과장의 하대는 과 내 다른 이들에게도 당연히 전염되었다. 군생활을 안 했거나 병사 생활을 한 이들은 ‘뭐 그게 대수냐’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상당히 굴욕적이었다. 경기도 어딘가 한적한 시골에 위치한 국방어학원에서 밤하늘 별을 세다 군사용어를 외우고, 군사훈련 후 맛탱이가 가버린 영어 귀를 위해 매일 CNN을 틀고 자던 내가... 이러려고 그렇게 몇 주간 개고생을 했나 싶은 굴욕감이었다.


파견 온 사무실에서 나의 호칭은 “야”가 아니라 “박 소위” 혹은 “통역장교”로 바뀌어 있었고, 모두 나에게 경어를 사용했다. 단순히 파견이기 때문이라고? 아니다. 그분들은 내 짧다면 짧은 3년 군생활 동안 전국 각지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도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모습이었다.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은 떡잎부터 다른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우선 각설하고... 꽃길 같던 파견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한 번도 TF장인 그를 만나보지 못했다.


미군과의 전략회의와 기획회의가 달력에 수두룩 빽빽인데 매일 전쟁터로 나가는 마음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통역을 기다렸지만, 그는 날 부르지 않았다.


당시 그는 막 장군으로 진급한 군인이었다. 사실 정책 부대에서 별 하나쯤 단 장군들은 ‘발에 차인다’고 표현할 정도로 숫자도 많고 기도 못 편다. 우습게도 별들의 전쟁에서 가장 최하위 포식자인 그들은 짬이 어느 정도 차오른 소위한테도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하니까. 그런데 그는 날 부를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발표자료를 열심히 만들고, 온갖 자료들을 번역해서 실무자들에게 제출했지만 “수고했어요 박 소위”라 할 뿐, “오늘 통역 00시 00에서 있어요”라는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웬 처음 보는 대령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어... D 팀장 어디 갔죠?”라고 나에게 물어본 것이 우리가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자리에 없다는 나의 말에 뒤돌아서 나가다 잠시 멈춘 그는 “이번에 파견 온 통역장교가 너구나. 자료 잘 받아보고 있다. 고맙구나.”라고 얘기하고 자릴 떠났다. 어리둥절했다. ‘뭐야 저 사람?’이라 생각하고 자리에 앉아 다시 문서 작업을 하던 그때의 나는 준장(진), 즉 진급이 확정된 대령인 그가 TF 장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 본부장님 통역을 위해 참석한 회의에서 나는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있는 서투른 영어지만 또박또박 자신의 논리를 펼쳐가는 그를 마주하면서 ‘왜’에 대한 수수께끼를 해결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영어를 잘한다의 기준을 발음에 맞춰 생각하곤 한다. 실제로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의 영어 발음을 트집 잡아 그의 영어 실력을 깎아내리던 것이 불과 몇 년 전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그리고 반대로 CNN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유창하게 말을 뱉으면 ‘오 영어 잘한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조차도 발음이 웃기거나 서투르면 영어를 ‘못한다’라고 나도 모르게 가정해버리곤 했다. 하지만 결국 언어는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논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잘 얘기할 수만 있다면, 표현이 조금 서투르더라도 공식석상이 아닌 이상 통역은 필요하지 않다.


그는 딱 그렇게 표현력은 서툴지만 논리적인 사람이었다.


영원히 날 찾지 않을 것 같던 TF장이었던 그는 우리 본부의 차장으로 왔고, 그렇게 나와의 진정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굳이 통역장교를 필요로 하지 않던 그와 난 유럽 출장을 같이 가게 된다. 폴란드와 벨기에(나토)를 방문하면서 배석하는 실무자들이 내용을 받아 적을 수 있도록 통역장교에게 임무를 부여한 그는 출장 기간이 지날수록 나와 엄청 가까워졌다. ‘합이 잘 맞는다’는 표현 외에 딱히 우리 관계를 설명할 방법은 없으리라.


그렇게 나는 누군가의 오른팔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영혼의 듀오 (사진출처: USSTRATCOM instagram @us_strategic_command)



차장님은 한국에 돌아와서 날 거의 매일 집무실로 호출하셨다. 우리는 간단하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부터 각종 뉴스나 현재 본부에서 돌아가는 일들까지 정말 온갖 잡다한 얘기들을 나눴다. 업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누군가와 그렇게 가까워지는 경험은 신선했다. 특히, 그는 나의 아빠뻘(물론 아빠보다 10년 정도 후배이시지만)인 사람이어서 더욱 특별했다. 거의 매일 티타임을 가졌지만 한 번도 나는 억지로 끌려간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 시간이 내 군 생활 중 가장 즐거웠던 순간들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등에 로션을 바르라고 하던 과장이 떠난 뒤 나는 “커피 타와라”를 입에 달고 사는 과장을 맞이했다. 이전의 과장은 말도 안 되는 행위들은 시켰을지언정 나를 깔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 온 이는 나를 정말 군생활 2년여 정도를 징그러울 정도로 괴롭혔다. 그렇게 내가 속해있는 과에서 고통을 당했지만, 차장님의 집무실 그리고 그를 수행할 때 나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다. 단순히 나를 하급자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견을 소중히 여기고 나와의 토의를 즐기는 그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언젠가 내가 저런 위치에 오른다면 난 꼭 차장님 같은 리더가 되어야겠다고.


스마트한 리더였던 차장님은 다행히도 승승장구하셔서 고속 승진하여 부장님이 되셨고, 덕분에 내가 오래오래 모실 수 있었다. 부장님에 대한 미군 장성들이 붙인 별명은 “early riser” 혹은 “the strategist of Korea”였다. 국방 전략 부문을 책임지는 인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과 동시에 빠른 진급을 하는 그에 대한 동경이 섞여있었다. 카운터파트인 미국 전략사령부의 아르마뇨 소장도 “early riser”가 별명이었으니 동맹인 양국의 전략가들이 다행히도 비범하게 똑똑한 사람들이 맡았던 것 같다(적어도 내가 근무하는 동안은). 부장으로 영전하신 직후 떠났던 미국 출장에서 그는 미 전략사령관인 하이튼 장군(지금은 미국군의 넘버 투인 합참차장이신)께서 진급 축하 덕담을 건네자 이렇게 답하셨다.


아르마뇨 소장님과 부장님 (사진출처: USSTRATCOM 공식 홈페이지)


John is my 50%. One of my stars is his.


눈치챘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John이 나를 뜻했다(하이튼 장군도 이름이 John이셔서 항상 날 이름으로 부르곤 하셨다). 열심히 보좌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 누가 나 같은 하급자를 그렇게 챙겨줄 수 있었을까? 과에 돌아가면 커피나 타야 하고 제본만 해야 하는 존재인 나를. 이런 멘트를 치는 부장님은 나의 잠재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법을 아는 대단히 똑똑한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인간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어떠한 공적이건 다 홀로 차지하고 싶어 날뛰는 이 세상에서 누가 저렇게 얘기할 수 있을까?


좋아하면 닮는다는 말은 꼭 이성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나도 어느샌가 부장님처럼 만년필을 쓰고 있었고, 그처럼 항상 책과 논문 그리고 활자를 가까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의견을 취합할 때는 그 사람의 배경이나 직위보다 주장 자체와 근거 자체에 대해서만 들으려 노력하게 되었다. 군 생활 중 투스타인 장군이 과장들과 회의를 하면서 항상 나를 배석하게 하고 의견을 말하게 했던 경험은 나에게 단순한 자존감 부스트가 아닌 앞으로 나의 삶에 있어서 방향타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3년이란 시간 동안 난 부장님과 정말 많은 업무를 같이 해나갔다. 개인적인 이야기도 정말 많이 나눴고 함께 밤을 새운 적도 많다. 그리고 부장님이 나와 출장을 다녀온 후 위암이라는 병을 앓게 되신 걸 알게 되었을 때도 함께 힘들어했다. 똑똑한만큼 꼼꼼한 이였기에 아마 스트레스로 인한 병마였을테다. 다행히 일찍 발견한 덕에 지금은 멀끔하게 나으셨지만!


지금은 사령관으로 계신 그를 통해 리더십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전형적인 카리스마로 이끄는 리더가 아닌 냉철한 전략가인 리더. 그의 많은 걸 닮아가기 위해 아직도 나는 노력하고 있다.


그를 보고 내가 느낀 좋은 “냉철한 전략가형 리더”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는 것이다:


1. 많이 필기한다.
인간은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가져도 금세 까먹을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 산다는 것을 항상 인지해야 한다.

2.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처음부터 계속 대화 파트너와 얘기한다.
혼자 하는 생각은 다듬어지는 속도가 매우 더디다. 얘기를 하면서 정리되는 것만큼 단순 명료하게 머릿속에 들어있던 논리를 드러내는 방법은 없다.

3. 실수에는 단호하게 대하되 결과는 담담히 받아들인다.
실무자들의 실수에는 불호령을 내렸지만, 지휘부 보고의 결과에 대해서는 담담히 받아들이고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인다.

4. 공개적으로 공적을 남과 나눈다.
상급자이건 하급자이건 나의 공로에 기여한 사람들을 인정해주고 공개적으로 이를 밝힌다. 이는 없던 충성심도 영끌하는 요소이다.


본의 아니게 스타트업 세계에 뛰어들게 되어서도 여전히 나는 그를 멘토라 생각하며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군 생활을 기억하려 애쓴다.


이번 추석 때 오랜만에 전화를 드렸다. 군을 전역한 지도 벌써 2년이 되어가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경상도 사투리가 날 반겼다.


“광성아~ 잘 지내나?”


미국 출장 마무리하면서 부장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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