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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angsungaa Oct 28. 2020

아빠의 사업이 망했다

당신의 주사위는 6인가요?

누구나 한 번쯤 ‘나의 삶은 영화 같지 않을까?’라는 허황된 생각을 해본 적 있을 것이다. 뭐 나만 그럴 수도 있고.


운명은 개척해나가는 것이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위대하다는 믿음을 강하게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내 삶이 흘러가는 방식만큼은 결정론자처럼 받아들였다. 즉, 나는 10대에는 어떤 삶을 살았어야만 했고, 20대에도 30대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낙천주의랄까. 우연히 10대와 20대 중반까지는 그 멍청한 낙천주의적 결정론자인 나의 가정은 크게 흔들림이 없었다. 아빠가 군복을 벗고 S사의 고문으로 가게 되었을 때만 해도 모든 내 삶의 퍼즐 조각들은 다 테이블 위에 올라왔고 맞추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라고 착각했다.


내가 얼마나 우매했냐면... 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선택받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까지 했다. 그래서 누군가 나의 가능성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더라도 크게 주눅 들지 않았다. 자신감 뿜뿜, 그 자체였다. 아마 20대 초중반의 나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내가 얼마나 자애심이 강한 인간이었는지 잘 알 것이다. 우습게도 내 영화는 정해진 각본대로 성장해서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물이 아닌 호러, 스릴러, 비극이 섞인 잡탕 영화일 줄 그땐 몰랐지만.


로스쿨을 준비하던 당시 나는 부족함 없이 자란 도련님 티를 내고 싶어 안달이었다. 연애를 하면서도 나의 가능성을 믿고 당신의 시간과 감정을 나에게 투자하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그런 주인공인 나에게 강력한 빌런이 나타났다. 당시 나보다 두 살 연상이었던 그녀는 내가 아무리 매달려도 넘어오지 않았다. 정말 웃펐던 점은 그녀도 나를 좋아하긴 했다는 것이다. 다만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는 우리가 연애를 하더라도 끝이 보인다는 그녀의 말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물넷의 난 치기 어렸고, 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소년이었다.


연애와 사랑에 이기고 지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일찍 깨달았으면 참 좋았을텐데.


하여튼 그렇게 나는 그녀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여느 커플처럼 사랑도 나누고, 수험생인 나를 위해 그녀가 도시락을 싸오기도 하고... 그런데 여기서 포인트는 나는 꽤 오랜 기간 그녀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넌 아직 던지지 않은 주사위랄까



강남역에 새로 생긴 커피집에 앉아 나와 셀카를 찍던 그녀의 논리는 이랬다. 좋은 고등학교와 유학생활까지 한 나는 주사위 같은 존재라고. 집안이 좋은 남자들에 비해 내가 가진 것은 미미하게 비범한 머리와 약간의 근성 밖에 없다고. 어떻게 이런 얘기를 웃으면서 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확마 


맥락을 조금 더 얘기하자면 나는 그날 그녀에게 왜 나를 만나면서도 맞선을 보냐고 청문회를 열고 있었다. 그런 나의 질타에 대한 그녀의 답변은 마치... '왜 이런 경제 정책을 폈냐'는 국회의원의 질문에 '나는 가난한 나라의 장관이라 정책을 어떻게 만들건 결과는 운에 달렸다'는 답변이랑 별 다를바 없이 들렸다. 그녀는 날 주사위에 비유했다. 즉, 주사위는 1에서 6까지의 숫자가 있는데 나란 남자와 연애해서 만약 결혼까지 하면 1부터 3이 나올 가능성이 꽤나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긴 5, 6 으로 이미 정해진 사람들과 결혼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이 날 비참하게 만들었다.


나 이미 6 아니었나? 내 자애심을 무참히 짓밟은 하루였다.


뭐, 시간이 지나 그녀는 미국으로 박사 유학을 떠났고, 한국에 잠시 귀국했을 땐 미안했는지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아마 그냥 나랑 그 사람 사이에 있는 이들에게 희대의 나쁜 x가 되기 싫었겠거니 싶다.


날 우롱한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난

보기 좋게 로스쿨 재수에 실패했다.


나와 커피를 마시러 내가 다니던 로스쿨 입시 학원 앞으로 수많은 맞선남들이 데려다줬던 그녀의 주사위 이론이 맞아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불합격의 기억이 잊혀지고 시간이 지나 통역장교가 되면서 난 그때를 회상하며 그녀가 틀렸다고 자신했다.


아빠는 고문 자리를 거쳐 한 IT 스타트업에 지분을 가진 부사장이 되었다. 여러 문제점이 보였지만 기술력이 있는 회사이니 괜찮다고 나나 엄마나 자기 위로를 했다. 아빠 역시 자신만만했고, 그런 아빠를 나와 엄마는 절대 기죽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빠를 대접하기 위해 온힘을 썼다. 아빠가 집에 들어오면 꼭 문 앞에 나가서 다녀오셨냐고 인사를 할 정도로 말이다. 뭐 당연한 예의일 수 있겠지만, 그땐 아빠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여러 무형적인 노력 중 하나였다.


군인의 길을 벗어난 아버지가 사회에서도 꽤 좋게 자리 잡으면서 나는 여유로운 집안의 자식이 어떤 기분인지 짧게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용돈도 넉넉히 받았고, 과한 소비를 하더라도 엄마에게 약간의 꾸지람만 듣고 나면 그만인 그런 삶. 드디어 나도 주사위 게임의 상위 포식자가 되는 것인가 가끔은 기분이 좋을 때도 있었다. 이전에 가졌던 자애심이라는 모닥불에 기름이라도 부은 듯... 나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잠실 도련님’이라는 카톡 프사명을 달 정도의 꼴불견이 되어갔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빠의 회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불안했다.


내 영화는 분명 성장형 히어로 영화여야 하는데. 점점 더 많은 비극적 요소들이 끼어들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효과의 발리우드 영화나 개연성 없는 할리우드 영화가 낫다고 할 정도로 모든 것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긴축 재정을 해야 한다는 엄마. 점점 얼굴이 어두워지는 아빠.


어느 정도 잘 나가는 회사(완전 잘 나가는 게 아닌)가 망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그 무너지는 기둥의 그림자는 우리 집안을 가득 덮었고, 아빠의 지분 몫으로 엄마가 내준 투자금은 휴지조각이 되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나 역시 아빠가 급전이 필요할 때 주택청약 대출까지 끌어 쓰면서 아빠를 도왔다는 것이다. 결국 그림자를 넘어서 실제 기둥이 무너져 내리자 남은 것은 빚 밖에 없는 암담함이었다.


IPO가 되면 우리도 이제 부자가 될 거라는 희망 회로를 돌렸던 우리 세 가족은 이 블랙 코미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엄마는 화병으로 심장이 고장 나기 시작했고 불면증세가 심해졌다. 자칫 잘못하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을 정도로 엄마는 위태위태했다. 그렇다고 아빠를 질타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의로 아빠가 우리 가족을 암담하게 만드려 한 것이 아니니까.


주사위녀의 말이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정말 나는 1부터 3 정도에 머무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일반적으로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주위 사람들, 그리고 능력까지 어느 정도 갖춘 내 친구들과 지인들이 점점 사회가 인정하는 5와 6에 도달할 때 나는 강제로 1 혹은 마이너스에 박혀 버린 것 같았다.


아마 이때부터 알게 모르게 패배의식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그 패배의식과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혁명가적 마인드가 묘하게 섞여 지금의 나라는 변종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어쨌건 당시의 나는 패배의식과 열등감이라는 악마들에 잠식당한 인간으로 탈모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으레 술을 마시듯 나는 진짜 바이브 노래 저작권료를 일부 받아도 될 정도로 술을 퍼마셨다. 7급 공무원에 준하는 200여 만원의 월급을 타는 내가 할 수 있는 사치는 소주 말곤 없었다. 더 슬픈 사실은 내 주변 사람 그 누구도 내가 이렇게 힘든 상황인 줄 알지 못했다. 내가 알리지 않았으니까. 알량한 자존심에 나는 ‘잠실 도련님’처럼 계속 살고 싶었다.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빨리 술에 취해 잠이 들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영화처럼 모든 것이 짠하고 좋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모든 것은 더욱 나빠지기만 했을 뿐.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고 이 작금의 위기를 어떻게 완화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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