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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angsungaa Oct 28. 2020

너가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그래

너 나랑 동갑이야 맞선임아

전화받았습니다.
전략기획본부 박광성 소위입니다.
충성


이 세 마디가 완성되는데 어언 1년이 걸렸다. 지레짐작하겠지만 나도 한때 흔한 얼타는 소위였다. 물론 소대장으로 부임하여 병사들의 생활을 괴롭게 만들진 않고 정책부서로 바로 배정받았지만, A급이 되는데 시간이 꽤 소요되었다. 인턴생활과 회사생활도 해본 스물일곱 인생 짬(?)이 꽤나 찬 소위이지만, 소위는 소위였다. 엘리베이터를 빨리(그때는 왜 그리 마음만 급했는지...) 타기 위해 아무도 안 타는 엘베로 도루하는 리드오프 타자마냥 뛰어서 탔더니 장군용 엘리베이터인 적도 있다. 그 안에 있던 별 2, 3개를 어깨에 단 장군들이나 올라탄 나 모두 다 같이 얼어붙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일단 내가 급하니까. “너 뭐냐”라는 작전본부장님 질문에 당돌하게 “예 저 전략본부 통역장교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장군님들이 빵 터졌다.


그땐 몰랐다. 왜들 웃으시는지... 씩씩해서 좋다는 말이 칭찬인 줄 알았던 나도 참.


첫 부임지가 삼각지에 위치한 합동참모본부라는 사실이 꽤나 자랑스러웠다. 그래 봤자 남들 다 하는 군대이지만. 난 의미를 부여했고, 특별함을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20대 청춘의 마지막 챕터를 군인으로 보내게 된 나. 부푼 꿈에 비해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어린 병사들에게 갈굼 당하기 싫어 통역장교를 지원했지만 이 곳에도 부조리는 있었다. 대부분이 어렸을 적부터 유학을 한 유학생들이나 꽤 좋은 대학을 나온 이들로 이루어진 집단인 만큼 좀 다를 거라 생각했다. 보기 좋게 틀렸다. 사람 사는 곳. 다 비슷하다.


빠른 90년생인 내 맞선임의 첫인상은 뭔가 턱주가리를 잡아보고픈 사람이었다(하관이 참 발달하신 분이었다). 처음 며칠 친절하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줄 때만 해도 나는 그가 천사라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는 여느 군 스토리에서나 등장하는 빌런 선임의 모습을 드러냈다. 사무실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지원을 하는 과 이름들을 외우던 나에게 그는 의자를 뒤로 돌리더니 컴퓨터 앞에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무심하게 툭 한 마디를 던졌다.


앞으로 점심 메뉴 정리해서 단톡방에 올려


점심 메뉴? 내 귀를 의심했다. 갸우뚱해서 반문하는 나에게 그는 하라면 할 것이지 왜 토를 다냐는 답을 했고, 나는 얼타는 소위 모드를 작동해서 메뉴 어디서 찾는지 모르겠다고 셀프 쉴드했다.


시간을 돌려 내가 부대에 전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내가 막내라 나를 챙겨준다고 생각했다. 선배들이 모두 다 같이 밥을 먹으러 와주고, 커피까지 같이 먹고. 근데 왜 그 생활이 계속 일주일이 지나고 그 다음주가 되어도 계속 점심시간마다 반복되는지 희한하다 생각할 때쯤. 바로 그때쯤 그는 나에게 점심 메뉴를 정리해서 사내 메신저로 선배들에게 보내고, 맛없을 것 같으면 식당 추천을 하라고 했다. 나이가 다 비슷비슷한 이들 사이에 점심 메뉴 셔틀이 존재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말로만 듣던 꼰대 갑질인 것인가 싶었다. 솔직히 그가 나보다 나이가 엄청 많았다면 그냥 똥 밟았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랑 동년배인 이가 나에게 이런 악폐습을 강요하는 모습은 욕지거리가 나오게 했다.


아마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2016년도... 꼰대, 갑질 등에 대한 사회적인 분노가 서서히 차오르면서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 시점. 아직 어디에 어떤 자료가 있는지 손에 안 잡힌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식사 단톡방 및 메뉴 추천 셔틀을 거부했다. 그리고 속이 안 좋다며 안 먹겠다고 말하고 지하 1층 매점에서 대충 때우는 일이 반복되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진 모르겠지만 지나가다 마주치는 선배 중 몇몇은 내게 눈치를 줬다. 소위 말하는 꼽주기. “광성아 넌 왜 우리랑 밥 안 먹냐”와 같은? 그리고 내 한 기수 위 선배(지금은 나와 절친이다)가 뒤에서 이런저런 말이 많이 나온다며 어차피 곧 전역할 사람들 살짝 비위만 맞춰주라고 했다.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유난이었나 싶기도 하다. 그때의 나는 왜 그 상황을 부조리하다고 느꼈는지 이해는 하지만...


지금의 나는 부딪히기 싫어서라도 그냥 곧이곧대로 했으려나?


웃프게도 맞선임과의 소소한 갈등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로 내가 화젯거리가 되어 모든 통역장교들이 내 이름을 알게 되리라곤 난 상상도 못 했다. 군인 신분이기 전부터 속해있던 재단이 있는데 그곳에서 한미 동맹 관련 행사를 종종 열곤 했다. 그리고 내가 이 곳에 퇴근하고 참가하면서 사건이 벌어진다. 아빠 친구 분들 중 한 명이 권유한 샴페인 잔을 들고 있었다는 이유로 나보다 한 기수 위 선배(그는 통역 수행으로 참가했다)가 오밤중에 다짜고짜 장문의 카톡으로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어디 소위 주제에 샴페인 잔을 들고 있고 자유롭게 행동하냐. 품위를 지켜라... 뭐 이런 내용을 거의 한 시간에 가깝게 쏘아댔다. 기수는 높지만 군번은 똑같이 15 군번이고 내 친구들이 나온 고등학교 후배라는 사실에 ‘내가 고등학교 선배여도 이랬을까?’ 싶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글을 쓰다 보니 이런 생각을 한 나도 꼰대인 것 같다. 어쨌건 나에게 그 상황은 코미디였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답장을 하면 사고가 터질까봐 일단 죄송하다 답변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자초지종을 아빠와 얘기를 나누면서 없던 분노까지 끓어올랐다. 아마 내가 메뉴 셔틀 때문에 분노가 차지 않았다면, 그냥 죄송하다고 보내고 넘어갈 수 있던 문제였겠지만... 당시 나는 거의 로마 콜로세움으로 끌려온 변방족 왕 출신 검투사마냥 전투력이 최대치인 버서커 상태였으니. 상대방은 똥 밟은 셈이다.


조목조목 그가 하는 말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지적했다. 당신은 나에게 지휘권한이 없고, 근무 외 시간에 한 짓거리가 언어폭력이며 부당지시라고. 그리고 우리 같은 군번인데 기수 하나 높다는 이유로 이럴 순 없다는 말을 했다. 킬포인트는 내가 그에게 영국의 최고 대학을 나온 수재가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되냐고 비꼰 것이다.


뒷일은 모르겠고 당한 만큼 갚아줬다는 생각에 속이 시원했다.


월요일이 되어 출근한 나에게 갑자기 맞선임이 나와 카톡을 주고받은 이의 이름을 거론하며 무슨 일 있었냐며 물었다. 내 맞선임이 왜 궁금해하는지 몰랐지만, 자초지종을 설명해줬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는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별 일 있겠나 싶었던 나는 평상시대로 열심히 일을 배우는 초짜 소위로 돌아갔다.


알고 보니 나에게 카톡 폭격을 받은 그 선배는 나와의 대화를 지 유리한 부분만 골라서 회장단에게 “고발”했다. 꼰지를 줄은 몰랐고, 실제로 나는 이게 육군 통역장교 회장단이 나설 일이라고 생각도 안 했다. 그리고 이 나의 안일함에 비해 이면에서는 선배들을 발칵 뒤집어놨다는 소식이 동기를 통해 카톡으로 전해졌다. 나에 대한 “징계 위원회”가 꾸려졌고, 나는 통역장교 회장단과 그 카톡 당사자가 속해있던 부대의 선임 통역장교와 대면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에게 ‘해명의 시간’이 주어졌다.


여기서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1) 깔끔한 공개적 사과

2) 현재 선배들이 하는 행위가 군 내 사조직을 만드는 것에 준하는 위법행위이며, 내가 한 행위는 전혀 법적으로 불리할 게 없다는 진술


눈치챘겠지만 나는 2번 옵션으로 갔다. 심지어 그들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대화는 녹취하겠다며 녹음기마저 킨 채로 말이다. 뭐 징계 위원회가 열렸고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징계 위원회에 각 기수장들이 모였는데, 나는 18기 기수장이지만 당사자라 제외되었다. 아직까지도 난 내가 징계 투표에 참가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수장으로서 말이다.


결론만 말하면 별 일은 없었다. 주의를 주는 선에서 끝내기로 했단다.


자 다음 퀴즈는... 여기서 그 통역장교 회장단의 회장이 누구였을까?

맞다.

바로 내 맞선임.


그가 편히 전역 준비할 수 있게 그의 대리 업무(라 쓰고 업무 인수인계라 읽는다)를 하는 맞후임인 나를 보호해주긴커녕 그는 “사회생활 안 해봐서 네가 뭘 잘 모르나 본데”라는 천하의 멍멍 소리를 시전해주셨다. 그깟 통역장교 2년 반 먼저 했다고... 인턴이랑 회사생활 합치면 내가 너보다 사회생활 오래 했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일장연설을 동갑내기에게 듣는 건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때 다짐했다. 이 거지 같은 문화를 바꾸겠다고. 내 후배들은 적어도 이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소극적인 반항으로 나는 내 맞선임이 전역하는 날 휴가를 써버렸다. 글에 쓴 스토리 외에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어쨌건 축하해주고 싶지도 않은 인간이었으니까. 난 쿨하지 못한 인간이다.


선배들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은 나는 훗날 내가 꽤나 선배(보통 1년 반 정도가 지난 통역장교)가 될 때까지 가십거리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 후배들이 많아지면서 문화에 대한 성토가 공공연히 이뤄지는 것을 보고 회장 선거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물론 도발적인 공약과 함께... 당시의 선거 포스터는 검은 사제들을 패러디해서 가람이란 친구가 만들어줬는데 이 역시 파장을 일으켰다. 몇몇 선배들은 “우리가 악마냐?”라고 질타를 했다. 전혀 의도치 않았던 전개였다. 깜빡했던 점이 바로 검은 사제들이란 영화가 퇴마 영화였던 것이다. 그냥 포스터 만들기 쉽고, 얼굴 두 개만 오려서 붙이면 될 영화로 고른 건데...


카피 괜찮지 않은가...?


당시 내가 내건 공약은 다음과 같다:

1) 회비 철폐;

2) 불필요한 행사 철폐;

3) 회장단의 모든 노력을 교육 및 홍보에 집중.


활자로 보면 뭐가 그리 도발적이냐 반문할 수도 있다. 다만, “불필요한”이란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누가 보냐에 따라서 불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난 그 기준을 ‘후배들이 선배들을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가’를 척도로 삼았고, 후배들이 돈을 모으거나 시간을 내서 해주는 전체 전역식부터 없애기로 했다. 그리고, 모든 불필요한 회장단 활동을 없애기 위해 회비를 없앴다.


계속 없앤다고 하니 그게 그리 위협적이었는지 전역한 선배들까지 나서서 나를 악마화했다. 영화 포스터대로면 내가 사제여야 할 텐데... 내가 악마가 되다니. 아이러니했다. 당시 모두가 호들갑을 떨 때 나를 감싸주던 선배들인 윤00, 남00, 송00, 김00 선배들에게 감사함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회장이 되었고(1표 차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찬/반...) 정말 포스터에 내가 쓴 슬로건처럼 모든 걸 바꿨다. 후배들은 반겼고, 선배들은 반발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앞으로 통역장교로 살아갈 시간이 더 많이 남은 건 후배들이었다. 누굴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해야 하는지 너무 뻔하지 않은가? 나는 회색분자였지만 동시에 강한 반골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강요는 싫었기에 기본적인 규칙을 통해 시스템만 구축했고, 삶에 있어서는 전혀 터치하지 않는 그룹을 지향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는 육군 통역장교 홍보활동과 교육에만 집중했다. 그 외에는 뭐 상담사 역할 정도만 했달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말이다.


<90년생이 온다>와 같은 MZ 세대에 대한 책들이 홍수처럼 나오는 시대에 내 옛날이야기, 특히 군대 이야기는 식상할 수 있다. 그리고, 바뀌어가는 세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은 윗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마 실제로도 4, 50대 관리직인 사람들이 이런 책들을 읽고 강연을 들으러 다닐 것이다. 도대체 왜 신입들이 특이한지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데 오히려 나는 반문하고 싶다. 당신은, X세대 혹은 밀레니얼이면서 오히려 젊은 꼰대이진 않은가? 나의 삶을 1년 간 불행하게 만들었던 이들은 모두 나와 동년배였던 이들이다. 당신은 정말 그들과 다른가?


우린 누군가에게 “네가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그래”라는 말을 무심결에 던지고 있지 않을까?

고작 1, 2년의 경험을 바탕 삼아 우월감을 느끼려고 하지 않은가?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에 살고 싶다면 나부터 부조리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혁명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머금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사업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살포시 처음으로 가져보았다. 문제들을 해결하는 이가 되려면 사업으로 돈을 벌고 그 자본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기약 없는 다짐과 함께.


그렇게 나는 회색지대로 한 발 더 빨려 들어갔다. 나는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나만의 착각과 함께.


한 발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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