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난 여전히 병아리
등 떠밀려 간 군대였지만 통역장교 임관식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다.
사실 임관식 자체에 대한 얘기에 앞서 우선 이 글을 빌어 세 명에게 감사를 표한다. 엄마, 아빠, 그리고 전 여자친구. 웬 전 여친? 오지랖 같겠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이야기를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통역장교 합격 후 공군과 육군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는 매우 즉흥적인 결정을 했다. 사실 이 갈등의 이유는 말 그대로 서울(전 여친) vs 친구들이었다. 우리 스터디 모임의 대부분이 다행히 합격하면서 발생한 문제이기도 하다. 육군은 통역장교를 단 4명만 선발했고, 타군은 더 많이 선발했다. 그래서 합격의 축복은 많은 멤버가 누렸지만, 나는 서울에도 가고 싶고, 다른 친구들과도 같은 군이 가고 싶기도 했다. 공군 입대는 9월 1일... 그리고 난 그 중요한 결정을 8월 31일 내 생일에 내려버렸다.
자 이 중요한 결정을 어떻게 내렸는고 하니... 우선 고등학교 후배이자 공군에서 먼저 통역장교로 복무 중인 재철이와 동우에게 많은 충고를 들었다. 술이 떡이 되기 전에 들어서 사실 숙취와 함께 게워내면서 다 까먹은 게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8월 31일. 대망의 입대 전 날 나는 클럽 앤서의 통나무집, 그러니까 클럽 테이블에서 군대 위로주를 사겠다며 모인 친구들과 함께 정했다. 딱 1달만 더 민간인 생활을 하고 가기로 말이다. 새벽에 술이 덜 깬 채로 일어나서 공군 훈련소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저 입대 안 하기로 정했습니다. 관련 서류 모두 폐기처분해주세요.”라고 말을 꺼냈고, 핸드폰 너머 상대방은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어’하는 톤의 목소리로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공군 훈련소로 향하는 친구들에게 “배신자” 딱지가 붙어 버렸다. 그리고 1달간 임시 민간인 상태를 유지하며 정말 원 없이 데이트하고, 원 없이 놀았다.
하지만 그 1달의 유예도 너무나 빨리 지나가버렸다. 훈련소에 들어가기 전 몇몇 선배들과 만남을 가졌고, 그들은 임관을 하고 나면 군사훈련의 여파로 인해 머리가 아주 새하얗게 포맷이 된다는 희소식을 전해주었다. 통역은 고사하고 ‘하이. 하와유. 마이 네임 이즈...’ 수준으로 영어도 돌아간다는 것이다. 나름 힘들게 공부하고 살아온 내 머리가 그렇게 비자발적인 포맷을 당한다고? 그래서 어떡하지? 이를 대비할 방법을 물어봤지만 선배들 역시 딱히 해답은 없었다. 그런데 살짝 눈치를 보니 편지 시스템을 잘 이용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우선 훈련생들은 아침, 저녁으로 손편지를 1통씩 받을 수 있고, 하루에 1통 인터넷 편지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개인 소지품으로 책이나 공부할 자료는 못 들고 가지만 만약 이 편지 시스템을 해킹한다면? 무릎을 탁 칠 정도의 내 꾀에 내가 놀랐고, 그렇게 작전명 mail hack을 수립하였다. 이 작전을 충실히 외부에서 지원해준 세력이 바로 엄마, 아빠, 전 여친이다. 아직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당시 전 여친은 나에게 아침, 저녁으로 편지를 써주었다. 그리고 그 편지에 내가 미리 전달해준 방대한 자료를 나눠서 보내주었다. 엄마와 아빠는 인터넷 편지에 짧게 안부를 묻고 그 밑으로는 국문 기사와 칼럼을 스크랩해서 보내주었다. 국문은 엄빠가. 영문은 여친이.
군사 훈련을 받고 내무반으로 돌아오면 난 그 편지들을 꺼내 찰나를 틈타 계속 공부를 했다. 미리 들어오기 전에 준비한 자료에는 혹시나 까먹을까봐 빼곡히 적은 단어 뜻과 중요 표시를 한 부분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8주 간 매일 나는 조금씩이나마 계속 활자를 내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이를 나는 후배들이 입대하기 전에 공부에 욕심이 있다면 추천하는 방법으로 소개했었고, “눈에 입힌다”라고 말했었다.
나이를 먹고 돌이켜보니 정말 온전히 내 편인 사람들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군대 간 내가 뭐 이쁘다고...
하여튼 그렇게 8주의 시간은 드럽게 시간이 안 흘렀고 무사히 임관식을 하게 되었다. 유격훈련 때 팔을 다쳐서 점수가 깎인 바람에 난 2등으로 수료를 하게 되었고, 교육사령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기분이 묘했다. 사실 상장은 중학교 때 이후로 나와 거리가 먼 존재였으니까.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상에 대한 욕구 말이다. 남들은 그거 받아서 뭐해라고 할지언정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게 되었고, 이 묘한 중독감은 추후 군생활 내내 계속 되었다.
어쨌건 상을 받는 나는 엄마, 아빠에게 “아들 상 받으니까 이쁘게 하고 오세요!”라고 알렸다. 그 자리에 전 여자친구도 오기로 하면서 어색한 여자친구와 부모님과의 대면도 계획되었지만 ‘뭐 어쩌겠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염려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 임관식에 왔던 전 여친은 굉장히 피 말리는 어색함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수상자 가족 및 친지로 분류되어 강당 위 무대 한 켠에 심지어 앉아야 했으니... 지금은 결혼한 커플인 한범이의 여친(한범이가 총장상을 수상했다)과 나란히 앉아 아마 그 둘은 부모님들과 같이 있는 어색함을 함께 싸우는 연대감 비슷한 무언가를 느꼈을테다.
무사히 임관식이 종료되었고 미래에 대한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강당을 나오자 살짝 당황스러운 사태가 벌어졌다.
동기들과 기념사진을 찍는데... 엄마가 늦둥이 외동아들인 걸 천하에 공포라도 하듯 “울 아가, 여기 엄마 보세요~”라 외치며 핸드폰을 요리조리 돌리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당시 여자친구는 옆에서 키득거리며 사진을 찍었고, 내 동기들과 그 가족들 모두 빵 터졌다. 뭐 어쩌겠어... 내가 그렇게 엄마 눈에는 아직도 유치원 졸업하는 병아리 반 어린이인걸. 아빠가 모는 차를 타고 서울로 함께 올라오면서도 전 여친은 내내 카톡으로 “울 아가~ 여기 엄마 보세요~”를 보냈던 기억은 꽤나 수치플이다. 사실 이 수치플은 4년 반의 연애 기간에도 틈틈이 비집고 들어와 날 놀릴 때 사용되곤 했다. 그중 대부분은 내 프사를 찍어주겠다며 이쁘게 자세를 잡아보라는 애정을 가득 담은 말이었지만 말이다. 엄마의 사랑이 전염되었던 것일까?
요즘도 가끔 집에 늦게 돌아오면 밤귀가 밝은 엄마가 깨어 내 침대 옆에 앉아있다 가곤 한다. 여전히 엄마의 나에 대한 집안 호칭은 “아가”인 건 비밀이다.
“아가 이불 좀 차내지 말고!”
엄마는 왜 그렇게 날 사랑할까? 이 사랑에는 어떤 조건이 붙어있을까? 무조건적인 사랑이 가능할까?
아빠와 엄마는 대학을 졸업하고 2년 후 결혼했다. 정확한 날짜는 까먹었지만... 완전한 책으로 완성되기 전까지는 글 쓰는 게 비밀이라 갑자기 물어보기 좀 멋쩍으니 대충 그렇다 치자. 육사를 졸업하고 전방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아빠와 고등학교 선생님인 엄마는 편지로 연애를 이어가다 결혼에 골인했다. 그리고 엄마는 선생님을 그만두었다. 그것이 얼마나 한이 되었는지 며느리는 계속 일하게 해줘야 한다고 입에 달고 사는 엄마. 미안하게도 나는 결혼할 생각이 거의 없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 선택을 내린 엄마는 고모가 득실득실한 집의 장남인 아빠와 happily ever after... 일리 없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아이를 오랜 기간 갖지 못한 엄마는 그리스도 버금가는 핍박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그래서 난 친척들에게 큰 애정을 갖고 있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들은 게 많아서... 나중에 혹시나 내가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가 생긴다면 입조심, 또 입조심할 것이다.
엄마는 우여곡절 끝에 나를 서른여섯에 가졌다. 결혼 후 만 10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내가 나온 것이다. 지금도 가끔 날 오랜만에 보는 엄빠의 친구들은 “어머 광성이가 이렇게 컸어? 10년 만에 가진 그 귀한 아들!”이라고 외치곤 한다. 시크하게 인사를 하고 딱히 반응을 하지 않아야 그들이 엄마와 ‘내가 얼마나 귀한 아들인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눌 수 있으므로 그렇게 내버려둔다.
어렵게 날 가진 엄마이기에 엄마는 나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엄빠는 그만큼 엄하기도 했다. 사실 군인 아빠와 선생님 엄마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진심 최악의 조합이다. 이 콤보는 보수적인 가치와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경계 등을 어렸을 때부터 확실하게 알려주니까... 아마 그래서 내가 더 비뚤어졌나 보다. 어쨌건 늦둥이 외동아들이라 싸가지 없다는 인식을 아무도 하지 못하도록 엄마는 나의 ‘외동이 가진 색깔’을 정말 열심히 뺐다. 그래서인지 나는 땡깡을 피지도 않고 잘 울지도 않는 ‘어른스러운’ 꼬마로 성장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외동인 줄 진작에 알았다’는 뉘앙스를 상대방이 말속에 담으면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미팅이나 소개팅에서 으레 물어보는 “형제는 있어요?”라는 질문 대신 “외동이에요?”라는 말을 들은 날이면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 것도 아마 어린 나의 기억이 아직도 날 지배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렵게 세상에 나온 아가는 그렇게 무럭무럭 커서 아빠 따라 장교로 임관까지 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육사 보낼까?”라던 아빠의 농담에 엄마가 핏대를 세우며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장교 둘은 용납 못해!”라던 엄마는 하염없이 유치원 졸업하는 아가를 대하듯 날 예뻐했다. 8주 만에 아들을 보면서 뭘 그리 볼을 쓰다듬는지... 생각해보면 희한하다. 유학생활 때는 몇 달씩 한국에 없었는데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지만 훈련소의 약효는 몇 주가 지나자 싹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서울로 배치받으면서 말이다. 출근버스를 타러 갈 때마다 나는 “아들 그래서 언제 외교아카데미 준비할거야?” 혹은 “아들 법관은 정말 싫어?”라는 질문을 받았다. 거의 매일? 하도 익숙해져서 “잘 다녀와”와 헷갈릴 정도였다. 알겠다고 손사래를 치며 출근했고, 틈이 나면 예전에 공부하던 국제관계 책들을 정주행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때의 난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회색지대로 난 점차 한 걸음씩 더 다가가고 있었다.
엄마 모르게.
나도 모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