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군대를 가기로 한 나의 결심의 반은 자발적이었고 나머지 반은 강제적이었다. 너무나도 간절하지 못했던 20대 중반의 나는 사실 반 정도는 ‘혹시나’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삼수할까?”라고 지나가듯 물어보았다. 엄마의 답은 단호한 NO. 심지어 괜히 꺼낸 삼수 얘기로 인해 나는 졸지에 군대라는 대한민국 남성 대부분이 풀어야 할 숙제를 식사 테이블로 가져오고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가져오는 무기 관련 다큐멘터리인 <화이어 파워> 시리즈를 보고, 특수부대 영화라면 다 챙겨보던 나이지만... 군대가 정말 가기 싫었다. 심지어 나는 나이가 병사로 가기엔 너무 많았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20살 혹은 21살에 병사로 입대하는 반면, 당시 나의 나이는 스물다섯의 끝자락이었다. 로스쿨 준비하던 당시 스터디에서 나는 가끔 농담으로 가군 서울대 나군 연세대 다군 군대 이렇게 3개로 나눠서 지원할거란 말을 툭툭 뱉곤 했다. 이 놈의 혀가 원수지. 그렇게 나는 다군인 군대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막막했다.
입대하게 되면 스물여섯에 이등병으로 들어가는 셈인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내 삶은 비참할 수 밖에 없었다. 살면서 머리를 조아려본 적 거의 없는 나에게 사형선고에 가까웠다. 물론 인턴생활이나 짤막한 회사생활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입대를 해서 스무 살, 스물한 살 한창의 피 끓는 이들과 한 공간에서 지낼 자신이 없었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웃프지만 스물이나 스물여섯이나 별 차이 없지만.
“군대 갔다 와서 네가 철이 들어야 열심히 그리고 간절하게 살지”라는 엄마의 불호령은 만만하게 볼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혹자는 그냥 대충 쌩까고 마이웨이로 삼수하면 되지 않냐고 할 수 있겠지만, 마이웨이도 해본 놈이 한다. 조기졸업 뽕에 맞아 흥청망청 엄카(+과외비로 틈틈이 번 돈)로 잠실 도련님 행세를 하던 나에게 마이웨이로 무언가를 한다는 건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리고 사실 자신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삼수를 하고 역시나 결과가 안 좋으면? 그땐 스물일곱에 빼박으로 군대를 가야 한다. 그래서 슬슬 군대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운전면허가 있으니 운전병을 해야 하나? 그래도 학력 나쁘지 않으니 행정병으로 빠지려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모두 결국 운에 매달려야 했다.
나처럼 누군가에게 조아리는 걸 싫어하는 아빠에게 “아들 군대 가면 잘 좀 봐줄 거임?”이라고 물어봤지만 역시나 답은 NO. 우선, 엄마의 “철이 들어야 한다”는 원칙에 위배된다. 그리고, 내 아들을 챙겨주는 게 세상에서 제일 눈치 보이는 일이라며 아빠는 손사래를 쳤다. 절망에 빠진 나에게 아빠는 “통역장교 지원해봐”라고 그래도 힌트를 주었다. 아빠가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비서실에 통역장교가 있었다고 한다. 장교여서 출퇴근으로 시간도 확보되고 영어도 까먹지 않을 만큼 쓴다는 인센티브는 일단 모두 럭셔리에 가까웠고, 병사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바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통역장교를 준비하기로 했다. 태어나서 내가 정말 뭔가를 정말 미친 듯이 열심히 한 적이 딱 세 번 있는데 그중 하나가 통역장교를 준비하던 과정이다. 똑똑한 선배님들이나 후배님들은 뭐 별거 아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정말 병사로 입대하기가 싫었다. 특히, 입시에 실패해서 고개 숙인 패잔병처럼 군대로 끌려가는 모습이 아닌 내가 선택해서 가는 길이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 통역장교는 정말 나에게 신이 점지해준 선택지였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동네 고등학교를 가면 사이가 안 좋았던 다른 학교 운동부 애들과 마주치는 게 싫어서 이를 악물고 공부했던 고등학교 입시. 이대로는 대학은 가겠냐는 고2 담임쌤의 말에 정신이 화들짝 들어서 대학을 준비하던 나. 그리고 미친 듯이 통역/번역을 공부하고 준비하는 나. 이 세 박광성의 공통점은 ‘간절함’과 ‘치열함’이었다.
26살 1월부터 준비를 시작한 통역장교 준비는 로스쿨 준비와는 다르게 재밌었다. 그리고 정말 간절했다. 당시 나는 10여 명의 친구들과 스터디를 짜서 공부했었는데 우리만의 아지트(지금은 없어진 빈브라더스 강남점)까지 잡아서 공부했다.
나의 일상은 이랬다.
6시 30분 기상 후 간단하게 몸 풀고 샤워
7시 국문 신문 일독 및 영문 아티클 찾아놓기
8시 30분 아침식사
10시 - 22시 식사 제외 모든 시간 영어 공부
응? 영어를 공부했다고? 잠깐만. 대원외고 나와서 유학까지 갔다 온 놈이 영어를 또 공부한다고?
맞다.
통번역을 잘하려면 국어 실력(로스쿨 준비 당시 언어이해 공부가 많이 도움이 되었다... 또르르)과 영어 실력이 모두 좋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엄마의 불호령에 첨가된 조건인 “육해공 전군 수석으로 합격할 경우에만 통역장교로 보내준다”는 말은 진짜 날 간절하게 공부하게 만들었다. 정말 닥치는 대로 읽고, 듣고, 필사하고 외웠다(당시 영어 공부법에 대해서 별도로 다루겠다). 그렇게 근 1년에 가까운 시간을 공부 > 시험 > 면접으로 가득 채웠고, 좋은 결과를 얻은 난 3군 중 육군을 선택하여 괴산에 위치한 학생군사학교로 가게 되었다.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질문받는 바이지만 ‘왜 육군?’이냐는 답은... 사실 여러 버전이 있다. 우선 대외용은 “아빠가 육군이어서”이고 (실제로 아빠는 1도 신경 안 썼던 것 같다), 실상은 당시 여자친구가 서울 용산 쪽에 있었고, 육군으로 들어가서 성적이 좋으면 용산으로 배치받을 수 있어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도박이었다. 왜냐하면...
1. 당시 여자친구는 내가 통역장교를 준비하던 시점부터 만난 뉴비 여친이었고.
2. 육군 장교 훈련이 해공군에 비해 짧은 편이지만 여전히 연락은 거의 불가능하다.
3. 대외적 이미지가 공군이 더 좋은데... 육군으로 갔다가 여자친구랑 헤어지면? 그리고 만약 서울도 못 가면?
회색지대를 살아가는 회색분자는 앞뒤 안 보고 들이박는 기질이 있다. 무엇이 흰색이고 검은색인지 알 수 없으니까. 내가 선택한 안에 대해서 내가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지원해주지 않으니까. 여하튼 그 위대한 도박은 성공했고, 나는 군사훈련 > 통번역 교육 과정을 거쳐서 서울 용산에 위치한 합동참모본부로 배치받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할 정도로 나는 그 기쁨을 당시 여자친구와 누렸고, 부모님에겐 담담한 척했다. 참 못난 불효자인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렇게 용산으로 오게 된 나는 해피엔딩일 것 같은 나의 20대에 또 다른 3년의 회색지대를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