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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angsungaa Oct 28. 2020

나이 스물다섯, 난 회색분자가 되었다

검은색도 하얀색도 아닌

미국 대학을 한 학기 조기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오면서 난 금의환향하는 세자 컨셉을 잡았다. 인천공항에서 리무진 버스와 택시를 번갈아타고 집에 들어오면서 "어마마마, 소자 천조국에서 돌아와 알현 인사드립니다!"라는 어마무시한 중2병 대사도 쳤다.


나는 엄마의 희망이었다. 집안의 미래를 책임질 빛과 소금. 기도의 대상이자 꿈을 품는 대상.


혹자는 날 부러워했을 수도 있다. 내가 원하는 음식을 항상 물어본 뒤 장을 보는 엄마와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항상 사주려고 하는 집안. 글로 써놓고 보니 외동아들의 엄청난 혜택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실상은 그와 다르다. '나'라는 대상이 꿈을 품는 대상이 되는 순간, '나'는 내 자아가 원하는 모습보다 꿈을 품고 있는 사람의 생각이 투영되고 있는 것이니까.


충청남도 당진에서 태어난 엄마는 아직도 학창 시절의 졸업장과 상장을 집 한 구석, 정확히 말하면 나의 서재방에 두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쳐본 적 없다'는 엄마의 말(대체로 너는 왜 열심히 공부를 안 하냐는 잔소리와 함께 시전 되는 스킬이긴 하다)을 나는 그 상장들을 보기 전까지 흔한 조선반도 호랑이 헬리콥터 맘의 허세라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의 잔소리 스킬이 사실임을 알게 된 후, 왜 엄마가 고향에 위치한 고등학교에서 한국지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선에서 엄마의 꿈을 멈췄는지 궁금해졌다.


돌아가시기 전 외할머니는 우리 집에 자주 머물곤 하셨다. 그리고 유학생활 중 집에 돌아오면 엄마, 나, 외할머니 이렇게 셋이 식사를 하다 보니 엄마의 옛날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각설하자면 그렇게 공부를 잘하던 안 여사는 천재 외삼촌을 서울로 보내기 위해 희생되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외삼촌은 경기고, 경복고, 서울고 3 대장 시절, 당진에서 경복고로 진학한 천재이니까. 그리고 엄마는 안타깝게도 그의 여동생이어서 서울로 유학을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유복한 가정이긴 했지만, 자식 둘을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로 유학 보낼 수준은 아니었고... 게다가 엄마는 남아선호 시대를 살아가는 한 명의 뛰어난 여성이었으니까.


p.s. 천재 외삼촌은 <욥을 위한 변명>이란 책을 남기고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나셨다.


엄마는 날 어렸을 때부터 외삼촌과 자주 비교하곤 했었다. 더 큰 꿈을 꾸지 못하게 한 대상과 아들을 비교하는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당진에 머문 엄마는 사범대로 진학하여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친구를 따라 놀러갔던 화랑제(육사 축제)에서 아빠를 만나 편지로 연애하다가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여 흔하디 흔한 주부가 되었다.



그런 엄마의 삶을 아는 나이기에 엄마가 나에게 자신의 꿈(공부를 통한 성공)을 투영하고 싶어함을 거부하기 힘들었다. 사실 그리고 내가 정말 뭘 원하는지도 잘 몰랐으니까. 그렇게 나는 과거 한양에서 장원급제를 하는 것과 같다는 엄마의 논리에 따라 사법고시를 통한 '검사'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도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그 꿈과 거리가 먼 길을 걷게 될 줄은. 물론 나조차도 몰랐다.


6차 교육과정과 7차 교육과정의 언저리에 고등학교를 다닌 저주받은 90년생은 법대가 사라진 세상을 맞이했다. 물론 법대가 남아있는 학교들이 있기도 했지만, 흔한 가오충인 고딩이였던 나는 유학반(영어과)이었던만큼 SKY 법대를 갈 것이 아니라면 유학을 가겠다며 생떼를 부렸다. 그리고 그렇게 난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대학 생활을 하면서도 전공은 Government & Legal Studies(정부학 및 법학)로 정했는데, 사실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전공 과목들이 재밌기도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나는 '법관'이 될 것이라고 엄마한테 듣고 자랐기 때문에 당연히 공부에 법은 필수라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엄마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라고 말했지만, 난 신림동 고시생이 되기 싫어서 그 때 막 도입되어 공존하던 로스쿨로 진학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5기, 6기 로스쿨에 지원했던 난... 보기좋게 떨어졌다.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긴 했다. 조기졸업을 하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흔한 유학생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안 해도 당연히 좋은 로스쿨을 갈거라 넘겨짚었던 난 정말 가열차게 친구들과 놀면서 지냈다. 엄마에게는 로스쿨 준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술을 마셔야 된다는 핑계를 댔지만, 마음 속 깊이 나는 알고 있었다.


그냥 내가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게 보기 좋게 2번이나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던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뒤쳐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조기졸업을 하고 지원할 때만 해도 미국에 있던 고등학교 친구들이 한국에 돌아와 의전원, 법전원에 합격하거나 미국 로스쿨에 합격하는데 나는 여전히 "준비생"에 불과했다.


재수가 실패로 돌아간 날, 난 강남역 길거리 한복판에서 펑펑 울었다. 지금은 죠스 떡볶이가 위치한 강남역 11번 출구 근처 골목에 위치한 피시방에서 결과를 확인하고 나와선 나는 내 고등학교 베프에게 안겨 펑펑 울었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다. 그는 의전원에 합격했는데 난 떨어져버려서 축하인사를 받기는 고사하고 펑펑 우는 나를 위로하느라 바빴으니까.


그렇게 나는 25살이 되던 해, 회색분자가 되었다.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나조차도 자신을 무엇이라 정의하기 힘든 존재.


나는 그 날 엄마에게 돌아가 솔직하게 말했다. 미국에서 돌아와 2년 동안 세월을 허비했다고 그리고 이 길이 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처음으로 엄마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다. 나 역시 엄마 앞에서 울었지만, 설거지를 하면서 내 말을 듣던 엄마도 절망하지 않았을까? 당신의 꿈이 투영된 아들내미가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길을 잃은 나는 25살에 처음으로 성장통을 앓게 되었다. 그리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여느 대한민국의 건장한 남성들과 동일한 선택을 했다.


입대를 하기로.

현실로부터 도피하기로.

나의 회색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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