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색지대, 그 시작과 종점. 엄마.
나는 엄마에게 큰 소나무 같은 자식이 되고 싶었다.
TV에서 부모와의 천륜을 저버린 이야기가 나오거나 사회현상으로 캥거루족 같은 단어를 들먹이면 난 분노의 손가락질을 해댔다. 그리고 엄마에겐 노후 생활은 내가 책임지겠다며 호기롭게 말을 뱉곤 했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유아적인 사고와 운까지 어느정도 받쳐줬던 나의 10, 20대 당시 삶의 흐름은 그 호기로운 말들이 나에게 화살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30이라는 숫자의 길목을 지나서도 엄마에게 아들의 성장을 기다려달라고 하고 있다.
기다려달라고.
그런데 기다리면 정말 모든게 나아질까?
이번 추석 연휴에 오랜만에 집에 돌아갔다. 주중에는 부암동에서 사업을 같이 하는 친구들과 지내고 주말에는 본가로 돌아가는 삶을 반복한지 어언 1년이 다되어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연휴에 집에 온 외동아들을 엉덩이까지 토닥이며 반겼다. 아들만 오면 밥상이 달라진다는 아빠의 투정이 이제는 미안할 정도로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
추석 직전 일어난 여러 사태로 머릿 속이 복잡한 아들래미는 엄마가 요리한 잡채를 보고 정신없이 집어먹기 시작했다. 사실 뭐라도 속에 집어넣어야 풀릴듯한 허기에 지쳐 집에 일찍 온 것도 맞으니까. 서른 넘어서도 엄마가 그렇게 원하는 안정된 직장, 결혼 등 그 숙원들과는 정반대로 살아가는 아들이 뭐가 그리도 이쁜지 엄마는 내 옆에 앉아서 열살은 어린 애인마냥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고 잇었다.
그러다 나는 엄마의 그냥 지나가는 말로 던진 질문에 다른 이야기들은 식탁 위로 튕겨내고 있었다.
"아들 요즘 재정상태는 괜찮아? 엄마는..."
나는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으레 사업을 하는 자식을 둔 부모라면 던질 법한 질문이다.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고 대답을 안해도 크게 신경쓰지 않을만한 지나가는 질문. 사실 엄마 역시 그 질문보다 그 뒤를 이어서 하고 싶었던 얘기들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동학개미운동이 있기 오래 전부터 준전업투자자인 엄마의 투자 관련 내용 말이다. 어떤 산업과 회사가 유망한지. 미국에서는 어떤 신기술들이 어떻게 세상의 변화에 일조하고 있는지. 엄마는 항상 호기심이 많은 투자자니까.
사실 근데 나는 엄마의 첫 질문에 이미 숨이 턱 막혔다.
나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A) 평상시처럼 "응, 뭐 괜찮아"라고 얼버무리기
B) 솔직하게 상황에 대해서 털어놓기
세상 모든 자식들이 그렇겠지만 솔직하게 무언가를 부모에게 털어놓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리고 그 솔직함에는 대가가 항상 있다. 이런 문제는 특히 부모에게 손을 벌리게 되는 것이니까. 엄마의 건강은 눈에 띄게 노쇠해지고 있고, 부동산, 주식 등 집안의 재정상태를 진두지휘하는 엄마에게 갑툭튀해서 마이너스 재무제표를 떡하니 들이미는 것이 미안하니까.
2020년, 새해를 맞이하여 기존 사업 외에 준비하던 사업 하나가 크게 어그러졌다. 감정적인 소모나 이런 부분은 각설하고, 같이 준비했던 친구가 '더 이상 같이 안하니 난 모르겠다' 식으로 나왔다. 자존심은 내팽겨치고 일단 하소연하여 약간의 비용부담은 하였지만, 대부분의 준비에 들어간 비용을 내가 떠안게 되었다. 회사 설립 후 비용으로 차입 처리하면 된다던 바보같이 순진했던 과거의 내 결정은 두꺼워진 카드 내역서로 나에게 돌아왔다.
추석 연휴로 인해 대금이 들어오는 시기까지 밀린 나에게 힘든 시점인 것은 사실이었다.
씹던 잡채를 마치 식은 물만두마냥 꿀꺽 삼키고는 잠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엄마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준비하던 사업 하나가 왜 그리고 어떻게 무너졌는지. 그리고 지금 리볼빙되면서 불어나는 카드값을 막기가 쉽지 않아서 이번 달만 엄마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염치없는 부탁까지 했다.
예상했다는듯 그게 다냐고 반문하는 엄마의 걱정어린 반응이 나를 더 괴롭게했다. 나는 애써 다른 고충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마냥 진짜 다른 힘든 점은 없고 딱 하나, 그 카드값이 힘들다고 했다. 거짓말을 하느니 얼버무리기로 다짐했던 사업을 시작했던 나는 그렇게 돈이 부족해서 엄마에게 거짓말까지 하고 있었다. 다 그만두고 싶다는 말까지는 차마 엄마에게 할 수 없으니까.
계속해서 받기만 하는 아들인게 분했다. 괜히 분해서 잡채를 먹고나니 식곤증이 온다며 집을 나왔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올게"라고 토하듯 한 마디를 내뱉고 집을 나와 정처없이 걸었다.
집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서른이 넘어서도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힘없는 아들이라는 사실이,
내 친구들처럼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엄마가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아들이 아니라는 꼬리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야 하는 엄마가 고마우면서도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다.
정처없이 아파트 단지를 빙빙 돌던 나는 내 삶에 투자한 엔젤투자자인 엄마가 언젠가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알 수 있도록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나는 온라인에 글을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떤 테마로 써야하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한 단어가 나를 스쳐지나갔다.
회색지대.
나의 삶은 끊임없는 회색지대였던 것 같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나는 회색지대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어둑어둑해진 후 집에 돌아온 나는 피곤하다며 침대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일이 많아 바쁘다며 추석맞이 가족예배를 본 후 바로 부암동으로 향했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미안하다는 카톡을 보냈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글을 쓰기로 했다. 언젠가 엄마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글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