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고 와'와 'have fun' 사이에서

언어, 무의식, 그리고 삶을 대하는 방식

by 그웬

오늘 우연히 김창욱 쇼의 한 대목을 보는데, 그런 말이 나오더라.


한국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시험이 있거나, 발표나 대회 같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대부분 “잘하고 와”, “시험 잘 봐”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니 진짜 그렇더라. 나도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말한 경우가 많았고, 또 그런 말을 들으며 자라기도 했다.


근데 영어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Do well”이라고 하지 않는다(굉장히 어색하네?)

오히려 “Have fun!”, “Enjoy!”, “You got this!” 같은 말을 더 많이 쓴다.


시험이나 시합 전엔 “Good luck!”, "Give it your best."

공연 전에도 “Break a leg!”,

대회나 발표 직전엔 “Knock it out of the park!”, “Go kill it!”, "Nail it"

그리고 끝나고 나선 “You crushed it!”, “You were amazing!” 이런 식.


물론 “I hope you do well on the exam.” 같은 말도 있긴 하지만. 좀 더 격식 있는 상황이거나, 선생님이 학생에게 하는 말 같은 느낌이랄까? 친구끼리의 일상적인 격려로는 확실히 덜 쓰이는 것 같다.






결과 중심 vs. 과정 중심



언어가 우리의 무의식, 즉 사고방식과 얼마나 깊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보여서 조금 무서웠다.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을 곱씹을수록 이는 단순히 격려나 응원을 보내는 차원을 넘어서, 결과에 대한 기대나 긴장감, 성취 중심적인 문화적 코드를 내포하고 있다. “잘하고 와”, “잘해”, “잘했어?” 같은 표현들 속엔 ‘성과를 내야 한다’, *‘실패하면 안 된다’*는 긴장감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누군가 “시험 잘 봐”라고 말하면, 그 안에는 이미 그 시험에서 ‘잘 봐야 한다’는 기대가 있고, '잘 봤느냐 못 봤느냐'는 것은 그 말을 한 사람의 기준이 있는 것이다. 갑자기 입시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때가 떠오른다. 학생들이 영어 시험을 치고 나서 "쌤~ 저 시험 잘 봤어요!"라고 할 때는 그들이 100점을 받았을 때다. 그 반대는? "저 시험 망했어요."이다. 100을 못 받은 경우다(시험지 기준으로는 100점이었는데 OMR 카드 마킹 실수로 3문제를 날려서 90점을 받은 학생이 망했다며 엉엉 울면서 전화 온 게 기억난다). '잘 하는 것'의 기준이 100점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시선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시험 치기 전에 늘 아이들에게 상기시켜주려 했던 것 같다. 최선을 다하고 오라고, 100점을 못 받아서 시험을 망했다고, 나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고, 최선을 다했으니 점수와 상관없이 그걸로 나는 너희들이 자랑스럽다고.


아무튼!


반면, “Have fun”이라는 말속에는 ‘과정을 네가 즐기면 그걸로 충분해’라는 시선이 들어 있다. 전체적으로 과정 중심, 자기표현 중심, 그리고 즐기는 태도가 중시되는 것이다. 말 한마디 차이지만, 그게 주는 감정이나 압박감, 기대치가 완전히 달라진다.






언어는 무의식을 비추고, 또 바꿀 수 있다



이런 걸 생각하다 보니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쓰는 언어는 참으로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긴장 상태, 심지어 자존감에도 영향을 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언어를 조금만 다르게 써보면 내 안의 감정과 태도도 달라질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 무의식을 반영함과 동시에 또 우리의 무의식을 빚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정말 다양한 상황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표현이자 나도 종종 쓰고 있는 표현인 화이팅/파이팅.


"파이팅!"이라는 말을 외칠 때 우리는 어떤 힘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게다가 이건 정말로 대표적인 콩글리시 중 하나라는 사실). 상황에 따라 영어로는 "You got this / Crush it / Good luck / Hang in there / Go you / You can do it"라고 말할 수 있겠다.


몇몇 표현의 경우 영어로는 너무 자연스러운데 대치되는 표현을 한국어로 하자니 좀 오글거리는 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발표나 공연, 또는 시험을 앞두고 있다면


“잘하고 와, 파이팅!" 대신 “즐기고 와!”

“떨지 말고 잘하고 와” 대신 “너답게 해. 네 무대니까!”

"파이팅" 대신 "즐겨보자, 준비한 만큼 보여주고 와"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이런 작은 언어의 변화가,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씩 바꿔 놓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 자신에게도 누군가에게도 말이다.


결과보다는 경험, 긴장보다는 여유.


언어를 바꾸는 일은 결국 삶의 태도를 바꾸는 일일지도 모른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언어를 바꾸어 삶의 태도가 바뀌든, 삶의 태도가 바뀌어 쓰는 언어가 바뀌든 어느 방향으로든 결국 시작이 중요할 테니!


(우선 '화이팅/파이팅'이라는 단어부터 무의식적으로 쓰지 않도록 신경 써보기, 우리 참 화이팅을 남발하는구나 증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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