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록을 대단히 성실하게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틈틈히 하는 편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때부터 스케줄러와 일기장을 겸한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매년 한 권의 다이어리를 써왔고(그 다이어리를 다 모아둔 박스가 내 방안에 있는데 가끔 심심할 때 읽어보면 오소소 소름이 돋으면서도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그 안에 오늘 해야할 일, 새로 알게된 영단어, 구썸남에 대한 푸념 등 잡다한 이야기를 적어나가는 것이 나의 루틴이자 취미였다.
타인의 기분과 반응을 살피는 더듬이가 남들의 두세배쯤은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타인의 시선과 판단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는 나는 그만큼 사람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힘든 일이 많았다. 오늘 그 애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는데 혹시 내가 예전에 이런 행동을 보여서는 아닌지, 그 애의 제스쳐와 눈빛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건지 바쁘게 행간을 읽었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참을 수 없이 소란스러울 때면 내 감정과 생각을 토해내듯이 글을 썼다. 그 대상이 애인이 되었을 때 안 그래도 발달한 나의 더듬이가 더욱 기세를 떨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주 비정기적인 일기를 쓰는 내가 유난히 펜을 드는 일이 잦다면, 그만큼 누군가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다는 뜻이었고 또 높은 확률로 그 누군가는 애인이었다. 그리고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는 망각의 은총이 내게도 내리고 나면 나의 감정과 자기비하 혹은 나를 위한 다짐과 응원의 말들로 채워지던 일기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글이 뚝 끊기고 이내 다이어리는 다시 하루하루의 to-do list를 적는 스케줄러로 돌아갔다.
비단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머릿속으로만 뱅글뱅글 생각을 돌려가면서 하기엔 쉽게 결단이 서지 않는 고민들, 누군가의 대화에서 문득 얻게된 통찰, 인상깊었던 책을 읽고 자연스럽게 떠오른 비슷한 맥락의 이슈 등도 무작위로 적어보곤 했다. 1분에 200타를 칠 수 있는 컴퓨터 타자가 아니라 펜을 잡고 자음과 모음을 하나하나 그리며 글을 써내려가다보면 자연스레 엉켜있던 생각이 정리되기도 하고, 글을 쓰며 떠오르는 여러 생각을 연결하고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나가는 사고의 확장 과정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렇게 글쓰기는 나에게 배설과 분출의 도구이면서도 내 생각의 맥락을 정리하고 또 펼쳐보는 매개가 되었다.
그런데 요즘 도통 글을 쓰고 싶지가 않다. 정확히 말하지면 글을 쓸 일이 없다.
재택근무를 하며 1년째 방 한 칸에서 일을 하다보니, 오프라인으로 누군가와 함께 일을 할 때 말을 주고받으며 함께 건네지던 약간의 감정들-짜증, 공감, 불만, 존경-의 밀도가 카메라 너머로 한참 희석되었고 자연스레 행간을 읽을 대상이 축소되었다. 같은 사람이 내게 늘 같은 경험과 감정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상 늘 만나던 친구들 위주로 만나게 되니 그들이 주는 익숙함 덕분에 역시 굳이 더듬이를 세워 누군가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일도 줄었다. 누군가와 로맨틱한 관계에 돌입한지도 꽤 되어서 나의 더듬이가 필요 이상으로 작동해 괜한 불안을 안겨주지도 않았다.
어찌보면 사서 불안해하는 내게는 조금 더 평화로워졌다는 점에서 좋은 일일수도 있겠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관계에서 오는 우울과 절망이 탐독의 동기가 되기도 했는데, 딱히 책에서 위로를 찾을 일이 없다보니 한창 예민하고 우울했던 작년 이맘때와 비교해서 독서량도 현저히 줄었다. 감정이든 독서든 채워지는게 적다보니 그만큼 글로 쏟아낼 것들도 적어졌고, 작년에는 꾹 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스펀지 같은 상태였다면 올해는 왠지 오랫동안 방치된 토기 화분의 퍼석퍼석한 흙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와중에 뭔가 나를 사소하게 분노하게 하는 일은 잦아서(ex. 평소에 교류가 없던 사람이 다짜고짜 연락와서 일 관련된 문제를 물어보는 것....정말 참을 수 없다) 불쑥불쑥 치밀어오르는 화기만 채워지며 더욱더 감정의 습기가 사라져갔다.
그래서 나는 요즘 별로 글을 쓰고 싶지 않다. 누군가의 감정을 애써 헤아려볼 일도, 내가 나에게 던져주는 생각거리도 없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펜을 잡아볼 마음도 딱히 들지 않는다. 자꾸만 모래를 씹은 것처럼 입안이 까슬해져서, 내 흙에 잡초라도 키워야하지 않나 하는 이상한 종류의 위기감이 드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