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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견과상념 Sep 28. 2021

1000km를 달리고 느낀 점

그리고 내가 달리기를 추천하는 이유

달리기 기록 1000km 달성을 기념하며 쓰는 내가 달리는 이유.


2018년 여름, 푹푹 찌는 여름밤 올림픽공원 내측 3.6km를 겨우겨우 달려내며 달리기 인생의 스타트를 끊었던 내가 어느새 만 3년이 지난 지금, 누적 달리기거리 1,000km를 넘었다. 

1000km 달성을 기념하며 골라본 오늘의 글쓰기 주제. 아무 생각 없이 운동이나 좀 해볼까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달리기를 지난 3년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원동력과 달리기에 꽤나 진심이 되어버린 이유, 누군가에게는 그저 다리를 내딛으며 땅을 박차는 행위의 반복인 지루한 운동인 달리기가 주는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한 줄로 표현해보자면, 달리기는 나의 안팎에 대한 감각을 새로이 일깨워준다.

<밖>

나는 특히 여행지에서의 달리기를 즐기는데, 달리기가 자동차나 다른 교통수단을 타고 지나갔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장소와 풍경을 좀 더 오래 눈에 담도록 도와주고 그것이 곧 기분 좋은 소소한 발견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달리며 어딘가를 지나치다 보면 적어도 세 발걸음을 탕탕탕 내딛을 동안 한 곳에 시선을 둘 수 있고, 머무르는 시선을 따라 생각보다 많은 것들 - 카페를 예로 들면 카페의 외양, 간판에 적힌 이름, 대략적인 크기 정도-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시선을 통해 흡수한 간단한 시각적 정보들은 내 안에서 관심과 궁금증으로 치환되었고 지도앱이나 인터넷 검색창을 켜서 조각조각의 정보들을 하나의 완성된 그림으로 맞춰보며 발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곳에 가게될 때면 운동복과 러닝화를 챙기고 달릴만한 코스가 있는지 검색해보는 것이 어느새 여행 루틴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제주도 구좌에서 1000km를 달성한 기쁨을 온 몸으로 표현해보았다 :D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할 때도 귀덕 해안로를 달리며 숙소 근처의 가볼만한 카페를 여럿 발견했고, 해녀쉼터, 수산물창고를 지나치며 간접적으로나마 해안가 어촌마을을 엿볼 수 있었다. 가와구치코의 호숫가를 달리며 보는 각도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는 호수 너머의 후지산을 원없이 보았고, 뉴욕 센트럴 파크를 위아래로 가로지르며 센트럴파크 안에 있는 호수부터 너른 잔디밭까지 공원의 면면을 즐길 수 있었다. 


가와구치코에서 본 잊을 수 없는 완벽한 후지산의 모습과 뉴욕에 대한 동경을 일깨워 준 센트럴파크의 러닝

달리기를 통해 시각적으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는 것 뿐만 아니라, 낯선 장소의 공기와 땅을 온몸으로 느끼며 달리기를 하는 동안만큼은 스쳐지나가는 여행자가 아니라 그 장소에 깊숙히 스며들어 무언가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계속해서 발을 구르며 딛고있는 땅을 느끼고, 몇 백 번 혹은 몇 천 번의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익숙하지 않은 공기를 폐 속 가득 채운다. 그렇게 달리기를 끝내고 나면 비로소 내 안과 밖의 농도가 맞춰지며 그 장소에서 묘하게 이질감을 느꼈던 내가 아가미가 돋아난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진다. 이번 여름 애월에서의 달리기도 그랬다. 어제까지만해도 낯선 곳이었던 애월의 바닷가는 특유의 짠내, 내 등을 밀어주는 바닷바람, 해안가에서 떨어져나온 현무암 알갱이들로 나를 폭닥 감싸며 내가 들어갈 자리를 내어주었다.


애월의 해안도로- 해안가 달리기는 언제해도 즐겁다



꼭 여행지가 아니라 집 근처에서 자주 달리는 천변도 계절, 시간, 날씨에 따라 다른 모습, 온도와 습도, 그리고 질감으로 낯섦이 주는 즐거움과 발견의 기쁨을 선사한다. 이렇게 달리기는 나에게 새로운 바깥을 열어준다.




(안)

달리기는 바깥 뿐만 아니라 내 몸이 안에서부터 주는 신호에 대해서도 그 어느때보다 날카롭게 느낄 수 있도록 감각을 벼려준다. 달리기는 어쩔 수 없이 태생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심박수가 올라가고, 모자란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폐가 펴지고 쪼그라들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땅을 박차는 행동을 반복하며 햄스트링이 팽팽해지고 무릎은 시큰해진다. 때로는 어깨가 불편하기도 하고 있는 있는 힘껏 뛰고 난 날에는 고막까지 먹먹하게 아프다. 몸이 익숙하지 않은 속도와 강도로 전신을 움직이다보면 자연스레 몸이 보내는 신호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런 신호들을 하나씩 읽으며 몸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다. 조금 더 낮은 자세로 달리니 무릎이 덜 아프구나, 이렇게 스트레칭을 하니 뭉친 곳이 풀리는구나 등 몸에 대한 자극을 느끼고 그 자극을 어떻게 흡수하고 풀어내는지에 대해 경험치를 쌓아 나간다.


최고 심박수 178을 찍은 어느 가을밤의 달리기


더 나아가 이런 경험과 데이터가 축적되어 내 몸의 가능성에 대한 지평 또한 함께 넓어진다. 달리기를 하기 전에는 거리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었고, 지도앱에서 찾은 경로가 도보 이동 거리가 700~800m가 넘거나 10분 이상을 걸어야한다는 안내를 보면 다른 경로를 검색해보기 일쑤였다. 하지만 달리기를 시작한 후 생긴 거리 감각 덕분에 앞으로 1km를 더 가야한다는 등의 안내를 보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고 얼마 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할지에 대해 예상이 가능했고, 이렇게 높아진 예상가능성은 직접 내 발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대해  스스로 정해둔 한계치를 넓혀주었다. 달리기는 내가 달리고 있지 않을 때에도 내 발로 직접 느낄 수 있는 공간의 범위를 확장시켜준 셈이다. 


마지막으로, 달리기는 사고의 확장에도 도움을 준다. 달리기를 하며 생각을 정리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생각이 자유로이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편이다. 그리고 외부자극의 방해 없이 자유로이 흐르는 생각은 나를 뜻밖의 곳으로 데려다 주기도 한다. 오랫동안 머리에서 표류하고 있던 고민의 답을 내리기도 하고, 달리기 후 남은 하루에 대한 계획을 착실히 세워보기도, 그리고 특별한 목적과 주제 없이 나의 신체 리듬과 눈, 코, 귀, 피부로 바깥의 환경을 느껴보기도 한다. 실은 이 글도 달리기를 하며 구상했는데, 앞서 언급한 애월에서의 달리기를 하며 뭔가 달리기의 뽕(?)에 취해 1000km를 달리고 나면 달리기에 대한 글을 써봐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 무료할 틈 없이 언제 어디서나 핸드폰, 특히 유튜브 등의 영상 매체를 달고 사는 내게 달리기가 가져다주는 반강제적인 일종의 명상시간은 온갖 외부 자극과 그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가득했던 나를 비워내며 저 깊숙한 곳에 머물고 있었던 나의 '오리지널'한 사고가 마음껏 확장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결국 달리기는 발견이다. 

본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존 수단이었겠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걷기와 달리 꽤나 드문 활동이 된 달리기는 심박수를 올리고 몸 곳곳을 새로운 공기로 채워내며 나를 달리기 전과는 딴판으로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달리기 전에 어딘가 찌뿌둥하고 멍한 상태였던 나는 달리고 난 후 새로운 감각, 엔돌핀이 가져오는 하이(high)함, 새로이 확장한 사고들을 한아름 가득 발견한 좀 더 풍성한 사람이 된다. 물론 달리다보면 으레 찾아오는 신체적 고통과 그 고통이 가져오는 도대체 내가 왜 이짓을 하고 있지하는 자조 섞인 후회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떠한 장비나 특별한 조건 없이 그저 내 몸뚱아리와 두 발 하나로 이뤄낼 수 있는 이 즐거운 발견의 연속을 나는 포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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