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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견과상념 May 09. 2023

조성진의 연주회에서 하리보가 떠올랐던 이유

041223 뉴욕 조각보: 조성진 피아노 독주회 기록, 카네기홀

 먼저 밝혀두자면 나는 예술의 맥락이나 수준을 논할 정도의 배경지식이 아주 미약한 사람이다.

굳이 따져보자면 대학교 교양 수업 시간에 겨우겨우 외워낸 몇몇 작곡가의 이름, 무슨무슨 사조 등을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 아는 수준이랄까. 지식의 부재는 자연스레 호오의 모호함으로 이어졌고, 특히 클래식 음악에 관해서는 어떠한 의견 자체가 영글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런 나에게도 유일하게 존재감이 있는 클래식 아티스트가 있었으니, 바로 조성진이었다. 그는 한국인 최초 쇼팽 콩쿠르 우승을 기점으로 한국에서는 클래식계의 방탄소년단 급으로 다양한 매체에서 폭넓게, 또 꾸준히 언급되어서 나의 없다시피 한 클래식에 대한 관심도와 무관하게 그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바로 그 조성진이 집 앞 15분 거리 카네기 홀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한다기에 무려 8개월 전에 티켓을 예매해 처음으로 무대 위에 피아노 한 대만 달랑 놓여있는 공연에 관객으로 앉아있게 되었다. 클래식 공연에 몇 번 가본 적은 있지만 대부분은 다채로운 현악기와 관악기, 때로는 저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타악기와 지휘자까지 꽉 채운 무대가 대부분이었다. 그에 비해 처음으로 마주한 피아노 독주회는 어쩌면 휑하게까지 느껴지는 너른 무대에 고고하게 선 그랜드 피아노 한 대와 연주자 한 명이 그들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뿐만 아니라 2,800여 쌍의 고막이 지닌 2,800여 가지의 기대치를 받아내야 하는 꽤나 엄중한 일이었다.


 그 엄중함을 뚫고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관객들이 저마다의 기대를 나누는 것도 잠시, 이윽고 그의 손이 건반 위에 놓였다.


 그리고 두 시간 여의 연주 끝에 마침내 그의 손이 건반을 떠났고, 그는 끝인사와 함께 무대 뒤로 사라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시간 내내 그의 손 끝, 발 끝에서 나온 모든 멜로디는 내게 무척이나 낯설었다. 단순히 처음 와본 피아노 독주회라서, 처음 듣는 음악이라서 느끼는 사실적 낯섦이 아닌 처음 느껴보는 감각적 낯섦이었다.


 그의 연주가 어느 정도 전개되자, 어느 순간부터 소리가 고막이 귓벽과 맞닿아있는 가장자리 끝까지 구석구석 전달되는 것 같았다. 평소에 듣는 소리가 주로 고막의 정 가운데를 자극했다면 신기하게도 음악을 듣는 순간에는 공간을 채우는 모든 음표들이 고스란히 내 귓바퀴, 고막의 모든 면적, 마침내는 그 소리를 느끼는 내이의 모든 기관까지 소실 없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면서도 모든 음가 하나하나를 적당한 강도로 정확하게 짚어내며, 내가 미처 인지하고 있지 못하던 청각 기관의 감각이 새삼스럽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소리가 최대한 잘 전달되게끔 설계되었을 카네기 홀의 구조와, 아주 비쌀 것임이 틀림없는 피아노, 한 치의 오차 없이 건반을 조율한 뛰어난 조율사의 덕도 있겠지만 클래식에 문외한인 나조차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게 만든 새로운 청각적 경험이었다.



 이와 더불어 음의 질감이 청각적으로 느껴지고, 더 나아가 그 질감이 또 다른 감각으로 전이되는 공감각적인 경험으로 이어졌다. 질감의 사전적 뜻은 재질(材質)의 차이에서 받는 느낌이라고 하는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질감은 ‘재료’가 가지는 성질을 뜻하는 재질(材質)이 아닌 ‘재주와 기질’을 뜻하는 재질(才質)의 차이에서 받는 느낌이기도 했다. 춤에서도 질감을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가 춤의 완성도를 좌우하기도 하는데, 같은 박자에 같은 동작을 하더라도 그 빠르기와 세기를 얼마나 잘 조절해 섬세하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확연히 달라진다. 겁 없이 잠깐 도전해 봤던 드럼을 배울 때도 질감 표현에 따라 같은 북을 한 번 내리치는 행위가 소음과 음악의 간극만큼이나 다른 소리를 만들어내곤 했다. 같은 악보를 보고, 같은 채로, 같은 드럼을 ‘쿵, 딱’이라는 같은 박자에 치는데도 내가 내는 소리는 미숙함이과 머뭇거림이 잔뜩 묻어나는 ‘ㅋ..ㅜㅇ 따..ㄱ’이었다면 선생님이 내는 소리는 노련함과 자신감이 빚어낸 쫀득하기 그지없는 ‘꿍!쓰—딱!!!’ 느낌이었달까.


 조성진의 연주는 그야말로 갖가지 질감의 향연이었다. 그가 가진 명백한 연주의 재질과 기질은 오선지에 가만히 누워있는 음표들을 푹신함과 단단함, 끈적함과 건조함, 여림과 부드러움을 가진 3차원의 것으로 빚어내었고 마침내는 청각이 아닌 다른 감각적 경험을 연상시켰다. 누군가에겐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그가 들려준 다양한 질감의 연주는 내게 여러 미각적 경험을 연상시켰다. 꽉 찬 화음이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오는 구간에서는 과자와 크림이 틈 없이 겹겹이 쌓여 직관적인 만족감을 주는 로아커가, 건반 위를 구르듯 연주하는 구간에서는 질기지도, 물컹거리지도 않게 딱 적당한 정도의 탄력을 가진 하리보가, 그리고 홀 전체를 울릴 정도로 무게를 실어 힘 있게 음을 누르고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음 음으로 넘어가는 구간에서는 한쪽은 바삭하지만 다른 한쪽은 부드러운 초콜릿인 빈츠가 떠올랐다. 샤이니의 곡 ‘View’의 가사 한 구절인 ‘보이기 시작한 음의 색’처럼, 내게는 음의 맛과 식감이 느껴지는 공감각적 경험이었다.


 건반을 치는 그의 손 끝과 페달을 누르는 발 끝이 빚어낸 이 경험은 아마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린다지만, 아는 것 없는 나에게도 이런 경험의 문을 열어준 조성진에게 마음을 다해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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