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조각보_내가 입기 싫은 옷은 남도 입기 싫다
약 세 달 전 부모님이 뉴욕에 오신 김에 안 입는 옷을 서울에 갖다 두려고 옷장 정리를 한바탕 했다. 서울에서부터 바리바리 챙겨 온 옷들 중에서 결국엔 손이 가지 않아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옷들을 정리해 부모님 편에 보냈다. 정리를 하며 뉴욕이든 서울이든 도쿄든 도무지 앞으로도 입을 기미가 없어 보이지만 상태가 멀쩡한 옷들도 여럿 나왔다. 서울이었다면 의류수거함에 넣었겠지만 여기는 재활용도 제대로 안 하는 덤핑의 나라 미국. 의류수거함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대로 모아서 버리려다가 브루클린에서 꽤나 많이 보였던 빈티지샵들이 생각났다. 뭐 별 잡동사니 같은 옷들도 가격표 달고 팔던데 이것도 한 번 팔아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한 곳에 정리해 모아두었다.
그리고 세 달이 흐른 어느 일요일. 그래, 오늘이었다. 세 달간의 게으름, 방치, 천덕꾸러기 취급을 이겨내고 마침내 내 옷들이 새로운 삶을 찾을 날이었다. 일요일 오후이고, 딱히 할 일도 없고, 날씨도 나쁘지 않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내 옷장에선 빛을 보지 못했지만 부디 남의 옷장에선 빛을 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거실 한 구석에 쌓아두었던 옷 꾸러미를 들쳐메고 ‘Where to sell clothes in New York’의 검색 끝에 나온 빈티지샵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처음으로 간 곳은 어수선하고 복잡한 여타 빈티지샵들과는 달리 좀 더 정돈되고 깔끔해 보이는 2nd Street (구글맵 링크) 이라는 곳이었다. 샵에 들어서자마자 유리장에 진열된 명품백들 덕분에 살짝 기가 죽었다. 뭐야... 난 그냥 H&M 옷 팔러 왔는데...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듯 내 옷들도 아무렴 가격이 매겨질 거라는 생각을 하며 당당히 옷을 팔러 왔다고 이야기했다. 역시 빈티지샵답게 로우라이즈 배기팬츠에 달라붙는 상의를 입은 힙스터 언니 (아마 동생일 거다.)가 날 맞아주었고 나에게 번호표를 주었다. 네? 빈티지샵에서 번호표요?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자 약 45분쯤 걸릴 거고, 옷 분류가 다 되면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어버버거리며 우선 알겠다고 하고 빈티지샵을 둘러보자 한쪽 선반에 다른 사람들이 팔려고 가져온 옷 꾸러미가 잔뜩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아, 이거 옷 파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구만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볼 일을 잠깐 보러 나갔다.
45분이 지나 다시 샵에 들어갔는데 아직도 옷 분류가 끝나지 않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결국 20분여간을 샵에서 더 기다린 후에 마침내 아까 그 언니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음 우리가 네가 가져온 옷들을 다 살펴봤는데, 그중 하나만 우리가 바잉하기로 결정했어. 9달러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옆에 있는 직원을 가리키며 그 직원이 바잉을 했다며 만약 바잉을 하지 않은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면 얼마든지 설명해 주겠다고 했다. 정돈된 샵의 분위기와 쯧, 겨우 그런 옷들을 팔러 왔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명품 브랜드 진열칸이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나는 굳이 더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하나라도 팔려서 다행인건가 하는 생각과 뭔가 창피하다는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태에서 언니가 안내해 주는 대로 신분증을 보여주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다른 빈티지샵에서도 옷 팔 때 신분증 요구를 했다. 왜지?) 무슨 문서에 서명을 한 후에 5달러짜리 지폐 한 장과 1달러짜리 지폐 네 장을 건네받았다. 옷 팔린 돈으로 사야지-하는 마음으로 신나게 골라놨던 산드로 스커트를 내려두고, 팔랑이는 지폐를 가방 속에 넣었다.
팔린 물건은 수년 전 회사에서 받은 백팩이었다. 옷은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포기할 순 없었다. 다행히 바로 옆에 Buffalo exchange (구글맵 링크) 라는 다른 빈티지샵이 있었다. Buffalo exchange는 무려 50년 가까이 된 전통 있는 빈티지샵 체인으로, 미국 전역에 40여 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다. 내가 교환학생으로 갔던 시애틀에도 지점이 하나 있어 거기서 커다란 구제 남방과 행사용 원피스를 구매한 기억이 있다. 이미 한 번 경험해 봤겠다, 분위기도 훨씬 더 캐주얼하겠다,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가게의 문을 열었다. 옷 팔러 왔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고 묻자 점원이 뒤쪽으로 가라며 안내해 줬다.
그런데 웬걸, 옷 파는 카운터에 줄이 길게 늘어서있었다. 아니 이렇게 옷을 팔려는 사람이 많다고? 아까도 족히 한 시간은 기다렸는데? (참고로 내가 백팩을 팔고 나갈 때쯤에는 2nd Street 대기시간이 1시간 30분으로 늘어나있었다.) 하는 생각에 맥이 탁 풀렸지만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 거기까지 간 이상 내가 기필코 옷을 팔리라는 사명감에 줄 끄트머리에 자리 잡았다. 다행히 2nd Street 보다 규모가 훨씬 큰 탓에 옷을 바잉하는 점원들도 많았고 줄이 생각보다 빨리 줄었다. 그렇게 20여분을 기다리자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왠지 모를 긴장감과 함께 카운터에 내 옷 꾸러미를 올렸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안녕! Buffalo exchange에서 옷 팔아본 적 있니?”
“아니..! 이번이 처음이야.”
“오 그래? 오늘 처음 팔러 온 사람들이 많네~ 그럼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바잉을 하는지 먼저 설명해 줄게.”
그 점원이 설명한 옷 구매 기준은 크게 세 가지였는데 스타일, 계절감, 그리고 브랜드였다. 당연히 수요가 있는 옷을 바잉해야했으므로 요새 유행하는 스타일을 우선시하고, 마찬가지 이유로 계절감이 맞는 옷을 바잉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브랜드였는데, 앞의 두 가지가 충족되지 않아도 인기 있는 브랜드라면 (예시로 든 브랜드는 루이비통이었다..) 바잉 한다는 것이 대략적인 기준이었다. 내 옷이 하나씩 펼쳐지며 2nd Street과는 다르게 점원이 내 눈앞에서 감정을 시작했다.
“음.. 이건 스타일이 좀 안 맞아. 네가 가져온 건 스키니진인데 요새는 와이드 팬츠를 많이 입으니까. 그리고 이건 여기 오염이 좀 있네… “
하나하나 나름 자세히 품평을 해주던 그는 마지막 옷 네 개 정도는 말없이 쓱 들어보고 카운터 한쪽으로 넘겼다.
결론은,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허탈함과 약간의 민망함, 창피함이 몰려왔고 기부라도 할 수 있냐고 물어봤지만 Buffalo exchange에서 기부는 따로 받지 않는다는 대답에 다시 옷을 주섬주섬 싸들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옷을 챙겨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자 솔직히 안 팔릴만한 옷들이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어느 마라톤 대회에서 받은 티셔츠, 한참 스타일이 지난 흰색 스키니 진, 계절감이 안 맞는 검은색 탑, 새 거지만 싼 티 나는 드레스 등 (아니 솔직히 이건 팔릴만했다고 생각하는데 안 팔려서 좀 아쉽다). 왕복 이동 한 시간, 대기 한 시간 반, 얘기하는 시간 30분, 도합 세 시간 끝에 내가 번 돈은 9달러였다.
그래도 돌아와서는 세 달간 나를 은근하게 압박하고 있었던 멀쩡한 옷을 버릴 수 없다는 죄책감과, 빨리 팔아햔다는 부담감, 그리고 세 달 동안이나 방치해 왔다는 자괴감에서 자유로워진 채 미련 없이 옷들을 쓰레기 수거함에 버릴 수 있었다. 시급 3달러로 귀결된 짜친 일요일 오후였지만 내가 입기 싫은 옷은 남들도 입기 싫다는 아주 당연한 논리를 육체적, 경제적, 정신적으로 대차게 깨달았다. 왠지 뉴욕의 패션 비즈니스 한 귀퉁이를 날 것으로 뜯어보고 경험해 봤다는 이상한 종류의 성취감과 그나마 판 게 회사에서 준 백팩이라는 아이러니함에 웃음도 났다. 뭐 9달러에 해방감과 웃음을 산거라면 그리 나쁘지 않은 거래일 수도 있겠다. 다만 혹여 뉴욕에서 입던 옷 팔아서 돈 좀 벌어볼까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꼭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벌이를 하게 될 수 있음을 명심하시고, 과연 이게 남들이 입고 싶을 옷일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스키니진이 다시 유행할 거라는 카더라를 듣고 은근 스키니진 판매에 기대를 걸어봤었는데, 아직 그 유행이 돌아오려면 멀었다는 점도 기억하시고.
9달러라도 벌게 해 준 회사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