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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견과상념 Oct 16. 2023

캠핑장에서 쓰레기는 챙겨가시고 이것은 두고 가세요

100523 뉴욕조각보_노스캐롤라이나 편

 노스캐롤라이나의 무어스빌이라는 곳은 Lake Norman이라는 다소 제멋대로 생겼지만 크고 평화로운 호수 근처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이다. 능력을 인정받아 무어스빌에 주재원으로 나와있는 H 덕에, 번잡스러운 뉴욕을 잠시 벗어나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발코니가 있는 집에서 매일 호수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는 호사스러운 일주일을 보냈다.



 H와 나와 닮은 듯 다르다. 우리는 일이 없으면 없는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서로의 불안과 부담을 공유했고 눈앞에 현실에 집중하는 성격답게 오늘의 점심 메뉴, 금요일 밤의 계획, 다가오는 브랜드 세일 정보를 같은 시차에 있다는 것을 핑계 삼아 툭툭 주고받았다.  모두가 무언가를 누군가와 끊임없이 하고 있는 뉴욕에서의 삶에 완전히 동화 혹은 잠식되어 뉴욕에 온 첫 해에만 인스타그램 친구가 100명 늘어난 나와는 달리 H는 주재원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명의 로컬 친구도 만들지 않았다. 다만 혼자 타기엔 꽤나 덩치가 있는 포드 익스플로러의 트렁크를 캠핑 장비로 하나씩 채워나가며 산을 베개 삼아 호수 옆에서 잠을 청했다.


 그런 H 덕에, 함께한 일주일 중 하루는 노스캐롤라이나 어느 주립공원에서 캠핑을 하며 보냈다. 유행하는 것이라면 소위 한 번씩 ‘찍먹’이라도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였지만 한창 캠핑붐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때에도 캠핑에는 영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저 공기 좋은 야외에서 하룻밤 자기 위해 모든 장비들을 꼼꼼히 챙기고, 캠핑 장소에 텐트를 치고 잠자리를 마련하고, 또다시 모든 장비들을 빠짐없이 철수하는 것이 대단히 수고롭게 느껴졌고 자연스레 엄두도 흥미도 생기지 않았다. H가 모든 장비와 노하우를 갖고 있어서 몸만 따라나선 캠핑이었지만 여전히 텅 비어 있는 흙바닥에서 장작을 쌓아 불을 붙이고 의자를 조립하고 텐트를 설치하는 것은 애초에 캠핑에 발을 들이지 않은 이유를 내게 상기시켰다. 사용한 식기들을 휴지로만 대충 훔친 후 남몰래 찝찝해했고 금방 어두워지는 산속에서 필수적인 조명 사용법도 손에 익지 않아 괜히 짜증이 났다. 결국에는 H에게 캠핑의 매력이 무어냐고 묻기에 이르렀고 H는 캠핑은 그저 어딘가로 여행을 갈 때 가장 쉽게 숙소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며 지극히 현실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 대답을 들으며 역시 잠은 벽과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자야 하지 않나라고 조용히 생각했다. 


 손이 야무지지 못한 탓에 캠프 사이트를 설치하며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다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복잡스레 뒤엉킨 마음을 안고 노지에서의 식사를 시작했다. H가 양이 딱 떨어지게 준비한 삼겹살을 굽고, 맥주를 마시고, 복숭아를 깎았다. 식사는 뭔가 어설펐지만 직접 장작을 쌓아 불을 피워 준비한 음식이라는 고양감이 부드럽게 더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자 수다도 점차 잦아들었고 나의 눈과 귀에 모여드는 감각에 자연스레 집중하게 되었다.


지금 보니 꽤 호사스러워 보이는 식사

 눈에는 지붕이 없어야만 보이는, 별이 촘촘히 꿰어진 하늘이 맺혔다. 최소한의 인공조명 덕에 캠핑 의자에 몸을 푹 묻고 고개를 뒤로 젖히기만 하면 제각각 반짝이는 별들이 앞다투어 눈으로 쏟아졌다. 귓가에는 벽에 걸려있는 티비에서 재생한 벽난로 소리 영상이 아니라 내 눈앞에서 불씨를 날려가며 타들어가는 장작이 내는 타닥타닥 소리가 고였다. 아주 작은 나뭇가지들이 부드럽게 부러지는 것 같은 타닥타닥 소리는 불안정한 고요를 안정적인 리듬으로 채워주었다. 내일 입을 옷, 답장해야 하는 메시지, 미처 끝내지 못한 일들이 촘촘히 짜여 돌아가는 나의 생각 회로에 잠시 브레이크가 걸리고,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주제와 유리된 생각들이 퐁퐁 솟아올랐다. 저 별의 빛은 몇 광년 너머로부터 왔을까, 드럼의 사이드북을 칠 때 나는 소리가 장작 타는 소리랑 비슷하지 않나 등의 단편적인 생각부터 평소에는 들여다볼 여유 혹은 용기가 없었던 나의 최근의 감정, 뉴욕에서의 생활 등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평소에는 무언가에 억눌려있었던 같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뇌피질에서 자유롭게 유영했다. 나의 몸이 벽과 지붕을 벗어나자 마음 또한 자유로워졌다. 





 그렇게 여러 생각들이 기지개를 펴고 나자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꽉 차 있던 마음이 조금 비워지자 비로소 새로운 감정과 생각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지금 내가 안전하게 이 캠핑장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대한 막연한 경이로움, 이 일련의 경험을 가능케 해 준 H에 대한 고마움 등. 안락하지만 일상적인 장소에서 반복되던 해묵은 사고와 감정은 불편하지만 비일상적인 장소에서 비로소 깨어지고, 신선한 생각이 발돋움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었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 ‘환기’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청소가 한없이 귀찮다가도 창문을 활짝 열어 방안 공기를 환기시키면 왠지 모르게 이 방을 쓸고 닦겠다는 의지가 생기는 것처럼 마음의 환기는 돌아갈 일상에서 겪을 어려움을 조금 더 잘, 혹은 다르게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환기로 인해 자리 잡은 새로운 생각과 감정은 일상에서 나를 메어둘 수 있는 닻이 되기도 한다. 업무를 하며 커뮤니케이션이 꼬여 잔뜩 짜증이 나다가도 내 머리 위에 있던 수많은 별들을 떠올리며 사실은 이렇게 짜증 낼 정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이해가 안 되는 누군가의 행동에서도 감사함을 찾아보려고 한다. 


캠핑장에서 쓰레기는 챙겨가되, 묵은 생각과 감정은 두고 가자. 나의 환기를 도와준 H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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