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조각보_브루클린에서 가장 핫한 테크노 클럽, Basement 탐방기
뉴욕에서 클럽 탐방에 재미를 붙였다. 물론 뉴욕도 클럽마다 분위기가 다르지만 서울의 클럽은 음악을 즐기러 가는 곳이라기보다는 파트너 탐색의 장 느낌이었고 그로 인해 생기는 과도한 서로 간의 텐션이 가끔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에 비해 뉴욕에서 지금까지 가본 대부분의 클럽은 서울에서 친구들끼리 술을 와장창 먹고 흥이 오르면 야! 노래나 부르러 가자! 하는 텐션으로 밤 11시에서 12시 사이에 충동적으로 가는 노래방에 가까웠다. 다만 흥을 분출하는 대상이 노래가 아니라 춤으로 바뀌었을 뿐.
운 좋게 뉴욕에서 마음 맞는 친구들을 몇몇 만나 자주 누군가의 집에 모여 pre-game을 하고 다 같이 클럽에 가서 놀곤 했다. (뉴욕에서는 클럽 술값이 미친 듯이 비싸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취해서 가기 위해 pre-game이라는 것을 한다. 보통 누군가의 집에 모여서 술을 마시는데, 도수가 높은 hard liquor보다 마시기 쉬운 소주가 친구들 사이에서 pre-game drink로 인기이다. 정작 나는 안주 없는 소주는 절대 못 마시겠어서 데낄라를 고수하는 중이지만...) 왓츠앱 그룹을 통해 서로 가고 싶은 클럽이나 디제이의 공연이 있으면 공유하기도 하는데 누군가가 브루클린의 Basement라는 클럽에서 테크노 공연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일단 가보지 않은 클럽이라 구미가 당겼다. 뭐든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내게 괜찮은 금요일 밤 계획 같았다. 다만 음악에 문외한이라 테크노 공연이라 하니 감이 잡히지 않아 친구에게 물어보니 공연의 헤드라이너라는 Daniel Avery의 디제잉 영상을 보내주었다. 테크노도 EDM의 한 종류일 테니 너무 정신 사납지만 않으면 틀어놓고 이메일이나 써야지 하는 생각에 무심코 회사에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틀었다가 1시간 30분짜리 영상을 3분 만에 껐다. 실로 정신 사나운 음악이었다. 내게 음악은 기승전결이 있는 것이 당연했고 특히나 EDM은 모름지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데이비드 게타의 Titanium처럼 서서히 고조되다가 절정에서 폭발해야 제 맛이었거늘 테크노는 그런 흐름이 전혀 없었고 귓가에 똑같은 박자의 비트만 반복해서 때려 박는 느낌이었다. 술에 아무리 취해서 간들 브루클린까지 가서 이런 음악을 두 시간 넘게 즐길 자신이 없어 우선 접어두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금요일에 약속이 없으면 누구보다 불안해하는 중증 ‘금요일엔 무조건 나가 놀아야 해’ 강박증 환자였다. 결국엔 고민 끝에 마땅한 대안(?)이 생기지 않아 안 가본 클럽에 가본다는 것에 의의를 두자고 결심하고 금요일 공연 티켓을 샀다. 그런데 그 클럽이 알아볼수록 심상치 않았다. Basement는 브루클린에서도 번화가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접근성이 안 좋은 것 치고 상당히 까다로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기본적으로 홈페이지에 적혀있는 ‘하우스 룰’이 10개 이상인데, 그중 도드라지는 것은 다음과 같다.
No photos or videos (사진 및 영상 촬영 금지)
No phone use on the dance floor (댄스 플로어에서 핸드폰 사용 금지)
The dance floor is for dancing, not conversation (댄스플로어는 대화가 아닌 춤을 위한 공간임)
Ticket purchase does not guarantee the entrance (티켓을 구매해도 입장이 보장되지 않으며, 입장 가능 여부는 입구에서 직원의 판단에 따라 결정됨)
티켓이 있어도 직원이 입장을 거부할 수 있다는 룰이 사실임을 증명하듯이 구글 맵 리뷰에는 실제로 거절당한 사람들의 별점테러가 꽤나 많이 보였다. 거기에 핸드폰 사용금지라니. 2023년에? 모든 걸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낱낱이 공유해야 하는 나에겐 가혹한 룰이었다. 하지만 beggars can’t be choosers (무언가를 원하는 자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라고 했던가. 절에 맞추는 중의 심정으로 사전에 친구에게 전달받은 대로 드레스코드까지 올블랙으로 맞춰 입고 pre-game을 한 후 클럽으로 향했다.
반갑지 않은 가을비가 더해진 클럽의 입구는 지하 던전으로 향하는 입구처럼 음산했다. 혹시나 입장을 거절당할까 봐 긴장했지만 다행히 신분증과 티켓 확인을 무사히 마치고 내부 촬영을 방지하기 위한 스티커까지 핸드폰 카메라에 붙인 후 들어선 클럽 내부는 다른 클럽들과 사뭇 달랐다.
우선 내부의 구조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댄스 플로어 전체가 옅은 스모그로 얕게 깔려있어서 공간이 얼마나 큰지, 벽은 어디에 있는지, 디제잉 부스는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술을 살 수 있는 바 쪽으로 가면 시야가 좀 트였지만 댄스 플로어에 들어오면 스모그와 고막을 때리는 반복되는 테크노 음악의 비트에 시각과 청각이 잠식당했다. 사실상 촬영을 하려고 해도 전혀 피사체가 분간되지 않을 환경이었다. 바닥은 벽돌이었다. 어떤 공간을 개조해서 만든 건지는 모르겠으나 바닥에 깔려있던 벽돌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그제서야 힐을 권장하지 않는다던 또 다른 하우스 룰이 이해가 갔다.
공간지각능력을 강제로 셧다운 시키는 환경으로 인해 탐색이랄 것도 없는 탐색을 대강 끝내고 술을 한 잔 들고 댄스 플로어로 갔다. 초반에는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으로 최대한 같이 간 친구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가시거리가 겨우 1-2m 정도여서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미 하우스 룰에서 댄스 플로어에서는 대화를 지양하라고 했지만, 음악의 볼륨이 무지막지하게 큰 탓에 대화도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혼자 춤을 추었다. 그러자 타인에 대한 집착과 관심이 사라졌다. 나랑 친한 친구든, 덜 친한 친구이든, 저기서 춤을 추고 있는 사람이 어떤 옷을 입고 있든, 성별이 무엇이든 스모그 안에서는 하나의 움직이는 몸짓일 뿐이었고 그 몸짓들은 내게 어떠한 감정적, 인지적 반응 또는 판단도 일으키지 않았다.
공간의 크기와 구조에 대한 파악이 어려워지자 공간에 대한 집착도 사라졌다. 보통 클럽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은 디제이 부스 앞이다. 많은 사람들이 디제이와 교감하려는 목적이든, 디제이와 교감하려는 그 사람들과 교감하려는 목적이든 앞으로 몰리고, 부스 앞은 으레 붐빈다. 테이블이 있는 클럽에서는 큰돈을 써서 테이블을 예약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선을 무엇보다 명확하게 긋는다. 클럽은 테이블이라는 공간을 별도로 판매하는 공간 비즈니스를 통해 구매자에게 여기에 이 정도 돈을 쓸 재력이 있다는 과시욕, 구매자의 취향과 선택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로 남자가 여자들에게) 잠시 이 선을 넘어와 상대적 우위가 주는 달콤함을 맛보게 해 줄 수다는 우월감을 충족시켜 주었다. 하지만 앞, 뒤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디제이 부스도 스모그 너머 빛으로 위치는 대강 파악할 수 있었지만 워낙 흐릿한 탓에 굳이 앞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물론 테이블도 없었다. “We do not sell or reserve tables.” 또한 하우스 룰의 일부였다. 클럽 안에서 나는 특정 공간에 대한 방향성, 선망, 혹은 선망에 대한 자괴감 없이 자유로웠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나에 대한 집착을 놓았다. 타인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자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내게 무관심하겠거니 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고, 클럽에 간답시고 크롭티를 입어 저녁 내내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아랫배에서 스르륵 힘이 풀렸다. 나도 결국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을 텐데 아랫배가 좀 나오면 어때-하는 생각과 함께 나를 향한 촘촘한 검열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해 인스타그램 포스팅 강박에서 벗어난 해방감도 더해졌다. 내가 얼마나 재밌게 누구와 어디서 놀고 있는지 알릴 방법도, 필요도 없었다. 과잉된 자의식과 타인에게까지 무의식적으로 적용하던 판단의 잣대들이 날개를 접고 나와 음악만 존재하는 무아지경(無我之境), 즉 명상적 상태로 접어들었다.
클럽에서 음악을 들으며 아무렇게나 춤을 추는 몇 시간 동안 이런 사고를 거치며 결론에 다다랐다. 고도로 발달한 클럽은 명상과 같다고. 나와 너를 연기 속에 감춰주는 댄스 플로어는 시각적 방해물을 최소화한 명상원이었고, 귓가를 일정하게 때리는 테크노의 비트는 싱잉볼이었으며, 누구 하나 빠짐없이 올블랙으로 맞춰 입은 의상은 명상복이었다. 그리고 하우스 룰은 결국 모두가 방해 없이 명상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구축해 주는 명상원의 규칙이었다. 까다로워 보이는 룰, 다소 괴이해보였던 분위기, 시끄럽기만 했던 테크노 음악 모두가 들어맞으며 내게 무아의 자유를 선사했다.
몇 시간 정도 신나게 발을 구르며 명상(?)을 하고 마침내 스모그와 시끄러운 음악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나오자 또 다른 해방감이 느껴졌다. 탁 트인 시야와 고요한 새벽이 갈증 끝에 마시는 콜라처럼 청량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다리는 무거웠지만 정신은 맑아진 채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라면 테크노 음악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고요한 명상이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클럽이 의외의 해방의 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단, 반드시 ‘고도로 발달한 클럽’에 가야 함은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