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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귀복 Dec 11. 2023

07. 천재작가, 악마의 유혹

무명작가 에세이 출간기

기가 막힌 우연이다.


슬럼프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니 슬럼프가 다가와 “친하게 지내자”라고 말한다. 얼마 전에 절교를 선언했는데 넉살도 참 좋다. 자존심도 없는지 금세 다시 찾아와 ‘방긋’ 웃으며 손을 내민다. 이 얄미운 녀석을 그만 보고 싶은데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짠’ 하고 얼굴을 들이민다. 이번 에피소드는 그제 저녁부터 쓰기 시작했다. 잊을만하니 녀석이 기어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무려 서른다섯 시간째 첫 문단과 씨름 중이다.


슬럼프가 옆에 앉아 해맑게 “같이 놀자”를 반복하고 있으니, 열 줄을 넘기는 게 평상시 열 페이지를 넘기는 것보다 열 배는 더 고통스럽다. 두 손을 간절히 모아보아도, 가슴 깊이 믿음과 소망을 간직해 보아도 도통 극복이 안 된다. 작가에게 슬럼프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이자 평생의 동반자인데,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가 않다.




“천재작가는 악마에게 이제 그만 발목을 놓아 달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천재작가가 신에게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악마가 견제를 시작한다.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를 유지한 채 먹잇감의 동태를 살핀다. 끊임없이 주변을 서성이며 기회를 엿본다. 싸늘한 기운이 작가의 영혼을 소리 없이 맴돈다. 천재작가답게 호기롭게 첫 문장을 시작하지만 문장은 금세 방향을 잃고 헤맨다.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진 악마는 어느새 다가와 손을 내밀고 기다린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원하던 방향이 아니다. 시작과 끝, 아니 든 게 잘못됐다. 썼던 글을 모두 지우고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한다. 단어가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허공을 계속 떠돌아다닌다. 악마는 때를 놓치지 않고 접근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인다.


“이 정도면 충분해. 대충 쓰고 넘어가자.”


천재작가를 혼란에 빠뜨려 원고를 망치려는 수작이다. 교란의 의도는 쉽게 파악이 되지만 심하게 흔들리는 동공의 움직임까지 멈추기는 어렵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언제까지 발걸음을 옮겨야 할까? 즐거움으로 시작한 글쓰기가 점차 괴로움이 되어간다. 간사한 악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만하면 됐으니 이제 그만 쉬라고 한다. 독자에게 지식과 즐거움, 감동을 전하기 위해 펜을 들었던 초심이 하게 요동친다. 창작의 고통에 부족한 수면이 더해지면서 일상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한없이 예민해진 육신은 개인의 고통을 넘어 가족의 희생까지 요구한다. 천재작가는 검은 머리를 바치고 어렵게 얻은 영감을 악마에게 내던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강렬한 유혹에 빠진다.


“악마는 작가의 조급함을 먹고 몸집을 키운다.”


작가가 던지는 먹이를 먹고 수시로 몸집을 불리는 악마를 보고 있으니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피와 살을 갈아 넣어 여기까지 왔다.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다. “천 번을 넘어져도 다시 일어선다”는 마음가짐으로 각오를 단단히 한다. 악마와의 가성비 좋은 계약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시급 백 원이라도 좋으니 욕심을 내려놓고, ‘가성비’ 대신 ‘가심비’에 집중해서 생각한다. 원고를 빨리 마무리하겠다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세상에 하나뿐인 원고를 완성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마감이 있는 것도 아니니 시간은 많다. 여유를 가지고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 새로운 단어로 색다른 문장을 만든다. 마음을 비우니 자음과 모음이 이제야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다정하게 손을 잡더니 산책을 나간다. 홀로 걷고 있는 글감을 보고 반갑다고 인사해 준다. 외로움을 느끼던 글감이 먼저 다가와 함께 걷자고 제안한다. 드디어 극복다. 이렇 성사된 만남은 재미있는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여 깊이 있는 글이 탄생한다.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악마를 만나면 신발을 벗어서 미간을 향해 힘껏 집어던져라.”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한 꼭지, 한 꼭지 원고를 완성하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자그마치 A4 100장이다. 써보면 알겠지만 10장도 힘들다. 비열한 악마에게 신발을 내던질 용기와 의지가 없다면 이제라도 포기해라. 원고의 마무리를 향해 갈수록 슬럼프는 더 자주 찾아온다. 수시로 마주하는 고비를 극복하고 원고에 마침표를 찍을 자신이 있는가? 지금은 쉽게 “그렇다”라는 답이 나오겠지만,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보자. 새해가 되면 헬스장은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 일 년 치 요금을 선납한 의지 넘치는 회원들로 가득하다. 이들 중 대다수는 첫 한 달도 채우지 못한다. 두 달이 지나면, 살이 뒤룩뒤룩 찐 악마는 새로운 먹잇감을 물색하느라 바빠진다. 이와 마찬가지다. 수시로 반갑다고 인사하는 슬럼프를 모른 채 하고, 원고를 끝까지 완성하는 사람도 드물다. 유혹에 약한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세상은 넓고 즐길거리가 너무 많다. 5G 시대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5초면 인터넷에 푹 빠진다. 목표한 바를 이루기까지 욕구를 잠시 억누르고, 글쓰기에 집중할 자신이 있는가? 전화기를 무음으로 바꾸고 몰입할 정도의 각오가 되어있다면 악마를 만나도 두려울 것 없다. ‘씩’ 한 번 웃어주고, 묵묵히 문장을 완성하자.


“악마에게 먹이를 주지 마라.”


글감이 떨어졌다고 해서 조급할 필요는 없다. 작가에게는 삶의 모든 순간이 곧 멋진 영감이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글을 쓰다 보면, 막막한 그 시간마저 후에는 글감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불안함을 내려놓고 차근차근 원고의 마침표를 찍다 보면, ‘마치는 글’의 마침표를 찍는 날이 반드시 온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슬럼프를 ‘투자자의 대출’처럼 생각하자. 유용하게 사용하면 자산의 퀀텀 점프를 이룩하듯, 적절하게 활용하면 당신이 남긴 글에 숨결을 불어넣어 준다.




“천재작가에게는 특별한 슬럼프 치료제가 있다.”


2시간 전, 05시 31분. 천재작가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손가락을 바삐 움직인다. 첫 글자를 쓴 지 어느덧 서른다섯 시간이 지났다. 첫 문장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포기하고 메모장을 닫는다. 마음을 비운 뒤, 전자책을 15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출근한다. 06시 32분, 회사에 도착해 메모장을 여니 언제 그랬냐는 듯 글이 막힘없이 써진다. 단팥빵을 입에 물고 부지런히 손가락을 두드린다. 07시 21분, 추운 차 안에서 드디어 마지막 단락을 쓴다. 고비를 넘기고 나니 역시나 글은 쭉쭉 써진다. 문장이 거침없이 길게 늘어지더니 마침내 동그란 작은 점 하나를 만들어 낸다.


이틀 동안 진통제 한 알을 삼키고, 좋은 책을 읽고,  즐거운 음악을 들으며, 서른일곱 시간을 고뇌한 결과가 여기까지다. 가성비는 모르겠지만 가심비는 최고다. 이제는 마음 편히 출근하고, 5시간 후 점심 먹으며 퇴고다.


“고맙다, 장범준. 오늘 아침 차 안에서 들은 <잠이 오질 않네요>의 도움이 컸다.”


덕분에 오늘 밤은 잠이 잘 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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