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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귀복 Nov 24. 2023

03. 천재작가의 퇴고

무명작가 에세이 출간기

천재작가에게는 슬럼프보다 백 배 정도 더 두려운 게 있다. 바로 퇴고다.


슬럼프는 끝이라도 있지만 퇴고는 끝이 없어서 더 무섭다. 고소공포증은 새발의 피다. 신(神)이 내게 “번지점프로 몸을 풀고, 스카이다이빙을 열 번 하면 대신 퇴고해 주겠다”라고 제안한다면, 엎드려 절하고 번지점프대에 오를 정도다.

이번 에피소드는 현실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초고에 힘을 빼고, 출간 원고 수준으로 끊임없이 퇴고하며 시간을 기록으로 남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막히는 부분 없이 쭉 읽혀 내려가기까지 얼마 큼의 노력이 있었을까? 알아맞히는 사람이 있다면 출간될 도서와 함께 한 달 치  월급을 보내겠다. 과하지 않냐고? 괜찮다. 단언컨대, 정답자는 단 한 명도 없을 테니까. 다들 알고 있겠지만 퇴고에는 끝이 없다. 고로, 보고 있는 원고도 발행은 되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 진행형이다.

무명작가의 퇴고 과정이 지루한 원고에 한 번 더 손을 뻗을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길 바라며, 천재작가의 퇴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초고를 완성했으니 이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결말을 알고 있는 내가 읽어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아마도 해가 달이 되는지도 모른 채 푹 빠져서 읽을 듯하다. 기대감을 잔뜩 품고 출간 후를 상상해 본다. 벌써 사십만 명이 넘는 독자들이 글을 읽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한다. 조울증 환자를 만들어 내는 사회 악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명문(名文)이다. 조만간 관련하여 경찰에서 조사가 나올 수도 있다. 혹시나 억울한 상황에 처해진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인 세상이다. 천재작가에게는 끊임없이 샘솟는 지하수처럼 인세로 계속 불어나는 통장이 있다. 대형로펌을 선임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 가능한 문제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만날 때마다 ‘ㄱ’ 자로 정중히 인사하는 변호사에게 위임장을 한 장 써준 다음, 두 발을 쭉 뻗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긴다. 조망이 탁 트인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브런치 연재를 준비한다. 백화점에 가서 명품백을 서너 개 구입하고, 남자의 로망인 시계 매장도 두세 군데 둘러본다. 차도 5년 넘게 탔으니 이참에 신형으로 바꾼다. 정든 집을 떠나려니 아쉽긴 하지만 집도 더 넓혀 적당히 50평형으로 이사한다. 기분 좋은 상상은 다음날 이어서 계속하기로 하고, 현실로 돌아온다.


‘휴~’, 드디어 초고 작성이 끝났다! 


오래간만에 베개에 침을 질질 흘리며 잠을 푹 잔다. 눈이 번쩍 떠지는 상쾌한 아침은 오랜만이다. 천재작가는 지난밤에 얻은 행복감을 쭉 이어가고 싶은 마음에 몸을 일으키자마자 원고부터 확인한다. ‘헉!’, 완성한 초고를 다시 보니 ‘DMZ(비무장지대)’나 다름없다. 밤사이 전쟁이라도 일어난 듯 문장이 온통 지뢰로 가득하다. 줄 서서 먹는 맛집에서 파는 메밀 막국수처럼 글의 흐름이 뚝뚝 끊긴다. 원고의 마침표를 찍고 검토할 때는 스스로 감탄하기 바빴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글이 되어 있다. 잔뜩 심술이 난 요정이 놀러 와서 장난을 친 게 분명하다. 완벽했던 초고가 아들 셋 키우는 가정의 거실만큼이나 난장판이 되어 있다. 문장과 문장이 남한과 북한처럼 남남인 듯 하나로 붙어있고, 모든 조사는 지뢰다.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역시 ‘아프니까 청춘이고, 힘드니까 작가다.’




“편집자님, 작가님 호텔에 감금해서 군만두 넣어 주세요.”


이런 뜨거운 반응을 기대하고 작성한 초고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천재작가가 기력을 다했는지 글에 몰입이 어렵다. 문장이 비실비실해서 다시 읽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다. 투자한 시간이 발목을 잡아 처음부터 새로 쓸 용기도 나지 않는다. 찬물을 한 잔 들이켜고 냉정하게 생각한다.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 직장인이 밤잠을 포기하고 어렵게 쓴 글이다.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천재작가는 안락한 호텔 대신 추운 차 안에서 단팥빵을 입 안에 넣는다.”


어차피 초고는 쓰레기다. 원고를 다듬기 위해 가뜩이나 없는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갠다. 따뜻한 아침밥은 사치다. 차 안에서 단팥빵 하나로 끼니를 때운다. 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양 엄지를 16배속으로 바삐 움직이며 퇴고에 집중한다. 반복되는 단어를 없애고, 앞뒤 좌우로 순서를 요리조리 바꿔본다. 어색한 문장을 지우기도 하고, 새로운 문장을 불러오기도 한다. 생기가 없는 초고를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욕심을 버리고 글을 계속 덜어내려 노력한다. 정성스레 작성한 긴 문단을 통째로 날려 보내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보유한 주식이 상장폐지 되었다”라는 소식을 접하는 것만큼이나 큰 치명타를 입는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마음을 다잡고 비워진 자리를 진심이 담긴 문장으로 하나둘씩 채운다. 여러 차례 퇴고를 거치고 나니, 원고가 다시 살아 숨 쉬는 기적이 일어난다.


다다익선 (多多益善)


작가를 위해 만들어진 ‘사자성어’가 분명하다. 수십 차례 퇴고를 거듭하다 보면 단어가 춤을 추며 제 자리를 찾아간다. 평소에도 흥이 많기로 소문난 문장도 어깨를 들썩이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적당한 곳에 터를 잡는다. 작가 본인조차 민망해하던 결점투성이 초고가 퇴고를 거치면서 비로소 안정을 되찾는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는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초고를 쓰레기로 비유할만한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다. 그의 대작(大作) <노인과 바다>는 200번이 넘는 퇴고로도 유명하다. 이처럼 노벨문학상에 이름을 남긴 대문호(大文豪)도 수십 번, 수백 번을 쓰고 지우며 퇴고한다. 당신은 어떤가?, 충분히 퇴고하고 있는가?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듯, 초고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퇴고하자.

“작가님! 제 통장 다 드릴게요. 작가님은 제발 글만 써 주세요.”

이런 열렬한 반응을 기대하는가? 독자들이 당신이 쓴 글을 여름휴가만큼이나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을 떠올리며 끊임없이 퇴고하라. 믿음은 곧 현실이 된다. 참고로 이 원고는 21번 퇴고했다. 초고 작성에는 2시간 46분 걸렸고, 퇴고에는 총 7시간 14분 걸렸다. 초고 작성을 위한 노력의 2배 이상을 퇴고에 쏟은 셈이다. 흐뭇한 미소로 ‘♡’를 누르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지루한 과정을 견뎠다. 천재작가의 믿음이 잠시 후 현실이 되길 바란다. 물론 응원에 댓글이 더해지면 더 좋다.

“본디 즐거운 일에는 퇴근이 없는 법이다.”

심장이 ‘쿵쾅쿵쾅’ 크게 뛰는 설레는 일을 만나면 이동을 하거나 식사를 할 때에도 머릿속이 바삐 움직인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하며 하루 온종일 생각에 집중한다. 마찬가지다. 글쓰기를 즐기는 작가에게 퇴근은 없다. 오직 퇴고만이 있을 뿐이다.

“작가가 되길 원하는가? 끝까지 다 읽었으니, 이제는 쉬지 말고 퇴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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