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단상
* 스포일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는 많이, 누군가에게는 조금
인터넷이 없던 1980년대, 음악에 대한 정보는 사람의 기억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던 시절, 헤비메탈애호가들 사이에선 헤비메탈 밴드의 이름과 음악을 많이 외우고 있는 사람이 고수로서 우대받던 시절이었다.
KBS FM 전영혁의 <25시의 데이트>에서 마음에 드는 음악이라도 듣는 날엔 그 음악을 한 번 더 듣기 위해 청계천에 가기도 했다. 당시 ‘청계천’이란 단어는 ‘세운상가’와 동의어였다. 고등학생이 세운상가에 가는 이유는 딱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불법 복제 음반을 사기 위해서, 나머지 하나는… 얘기하지 않겠다. 학급에 한 명 이상씩 있던 헤비메탈 매니아들은 자신이 보유한 LP음악을 테이프에 녹음하여 한번 더 유통시키기도 하였고, 나 같은 헤비메탈 서민들은 감히 넘볼 수 없던 그들 만의 커넥션도 존재하던 시절이다.
당시 새로운 밴드를 찾고 싶어 하던 나에게 한 친구가 리지 보든(Lizzy Borden)이라는 생소한 그룹의 음악을 들려줬다.
리지 보든이란 밴드가 다른 헤비메탈 그룹들보다 더 뛰어난 음악성을 지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밴드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 이름에 담긴 사연 때문이다. 80년대 헤비메탈 밴드의 이름은 무시무시했다. 메탈리카, 메가데스, 아이언 메이든, 모터 헤드 등 듣기만 해도 겁나는 이름들이었다. 이와는 달리 ‘리지 보든’이란 이름은 너무 평범하게 들린다. 사연인즉, 리지 보든(Lizzie Borden)이란 실존 인물이 있었고, 그는 자신의 부모를 도끼로 살해한 연쇄 살인범이라는 것이다. 이 설명은 나로 하여금 평생 리지 보든이란 이름을 잊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공포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도끼 연쇄 살인범의 이름을 밴드의 이름으로 사용하다니… 나이를 먹어가며 좋아하는 음악의 취향도 달라졌지만 리지 보든이란 이름만은 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렇게 30년이 지난 어느 날, 영화 <리지>를 관람하던 도중이었다. 이 영화에 대해선 별 정보가없었고, 단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주인공인 사극 정도로 알고 있었다. 관람 도중 극중 주인공인 리지(Lizzie)의 성(Last Name)이 보든(Borden)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다. 부모를 도끼로 살해했던 연쇄 살인범. 그런데 놀랍게도 남성이 아닌 여성이다. 아마도 여성이 그런 끔찍한 살인을 저지를 리 없다는 나의 선입견 때문에 여지껏 리지 보든은 남성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리지 보든이 도끼 연쇄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는 것이 이 영화의 스포일러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미국에서 리지 보든은 헤비메탈 밴드의 이름으로도 사용될 만큼 유명한 인물이다. 닐 암스트롱이 달착륙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아도 <퍼스트맨>을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하다. 미국에서 리지 보든은 닐 암스트롱만큼 유명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주인공 리지(클로에 세비니)는 농민들을 돈을 착취하고, 그녀의 친구이자 파트너인 브리짓(크리스틴 스튜어트)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아버지(제이미 쉐리던)에 분노했고, 그런 아버지의 재산을 갈취하려던 삼촌(데니스 오헤어)에게 분노했다. 무일푼으로 길거리에 몰릴 운명을 직감한 리지는 완전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 과정에서 파트너인 브리짓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계획은 실패하고 리지는 살인 용의자로 수감된다.
이 영화는 남성들을 부당하게 묘사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지만, 그렇다고 리지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지도 않는다. 주인공에 대한 애매한 시각은 영화 <리지>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게 만든다. 리지의 분노에는 일부 공감하지만 살인 방법은 여전히 끔찍하다. 살인은 살인일 뿐 건전한 복수가 될 수는 없다. 그 어떤 이유에서건 개인적인 복수는 범죄이다.
이처럼 영화는 그날의 사건을 냉철하게 재구성할 뿐 리지를 피해자로서 감정적으로 구제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19세기 말에 살던 여성들이 남성 중심 사회의 피해자라는 사실도 리지 보든이란 한 여성의 범죄를 무죄로 만들 순 없다. 리지를 동정하지도, 단죄하지도 않는 애매한 시각은 영화가 끝나도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리지가 아버지를 처단하는 행위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 대한 복수의 은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양어머니도 같이 희생된 점이나, 자신의 알리바이 완성을 위해 삼촌을 살려뒀다는 점은 지금까지도 리지 보든에게 여전히 살인마라는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결국 이 영화는 과정을 보는 영화이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분노가 어떻게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 그 과정에 집중해야 한다. 리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살이 이외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설득되었다면 영화가 승리한 것이고 설득되지 못했다면 실패한 것이다. 리지 보든이 연쇄살인범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관객이라면 “어디 나를 설득시킬 수 있나 보자.”라는 자세로 관람해보자. 누구 입장을 더 지지해 줄 수 있을지, 그래서 나는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도 이 영화를 관람하는 재미 중 하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