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인연이 생겼다!
#25
순례길 위에 가장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 날,
바다를 정말 원 없이 본 날,
그리고 날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던 날.
점심을 거하게 먹었으므로 간단하게 샐러드로 저녁을 먹었다. Froiz라는 슈퍼마켓에서 파는 샐러드인데 여러 가지 맛 중에서도 베이컨 들어간 걸 고르는 나라는 잡식주의자. 깔끔하니 한 끼 식사로 부족하지 않았다.
알베르게 야외에 있던 식탁에서 먹었는데 바로 앞에 포도나무가 있었다. 싱싱해 보이지 않는 포도가 주렁주렁 달려있어서 넋 놓고 멍하니 보고 있게 되던, 그도 그럴 게 딱 좋은 빛에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바람이 부는 곳에 말려뒀던 빨래는 반나절이 채 안 돼서 다 말랐다.
샐러드 사면서 같이 사 왔던 맥주 두 캔과 매일우유 맛이 나는 스페인에서 만든 포르투갈 브랜드 우유. 맥주가 두 캔인 이유는 그저께 같은 숙소에서 잤던 일본인 친구 카나짱이 같은 숙소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에. 갓 스무 살이 된 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한 캔은 다음날이고 지고 가서 마셨더랬다!
어렴풋이 '브라더가 죽어서 지독한 상실감을 겪었다'는 카나짱의 얘기에 당연히 오빠일 거라 생각했었다. 아주 작은 물통(150 ml 가량의)을 들고 다니는 카나짱에게 '그 물통, 네겐 너무 작아 보인다'라고 별생각 없이 얘기했더니 '브라더 기억하려고 들고 다니는 거야'라고 해서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던. 아마... 늦둥이 아가였나 보다, 잠시 카나짱 곁에 머물렀던 건... 지난 2년 간 하나짱과 우리는 지독한 열병을 겪어야 했으니까. 무덤덤히 얘길 전하는 그녀는 정말 그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각이 깊었다.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는지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와 지내는 게 어렵다고 했다. 그 나이 때는 뭐든 재밌고 솔방울이 굴러만 가도 까르르할 시기이니까(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래서 본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가 편하다던... 그런 그녀가 기특하기도 약간 안쓰럽기도 해서 나중에 내가 한국에 있을 때 한 번 놀러 오라고 했다. 흔쾌히 그러고마 하는 그녀는 도쿄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그녀의 집에도 오라며 집주소를 알려준다길래 가게 되면 나중에 인스타그램 dm으로 물어보겠노라 했다.
이런 인연도 만들어지는구나, 아무런 연고가 없었는데 이틀 전 정신이 나간 채로 숙소 리셉션에서 '한국인이세요?'라고 물었던 것을 계기로.
좋은 인연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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