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가랑비에 옷 젖으며 순례길을 걷다.

by 널리

#39


4인실에서 잔 덕분에 따뜻하게 잘 잤다. 역대 끝에서 두 번째였던 알베르게의 시설에 비해 너무 단잠을 잤다:) 사람 일이란 정말 알 수가 없는 것.

마지막 날 거리가 꽤 돼서 조금 일찍 일어났다. 7시 15분쯤에 눈을 떠서 양치만 하고 짐을 싸서 나왔다. 아침부터 빗방울이 떨어져 본격적으로 우의를 입었다. 밖에 나오니 드문드문 하지만 순례자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7시 반이 넘었음에도 어둑어둑한 풍경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길을 걷다 새벽(?)부터 나와 순례길 관련 소품들(배지, 조개, 간단한 음료수 등)을 파는 노점상이 있기에 순례길을 뜻하는 배지 하나를 3유로에 샀다. 마지막 날이니 이 정도의 무게는 더 얹어도 된다 싶어 참아왔던(?) 지름신을 받아들였다.


어두컴컴한 빗방울이 살짝 떨어지는 날씨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더없이 나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줬다. 포르투갈/스페인을 걸으면서 어둡거나 사람이 없어서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다. 이건 이 두 곳이 정말 안전해서이거나, 내가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이거니, 많은 나라를 경험해와서이거나, 순례길이 주는 원래의 느낌이거나. 뭐가 됐든 굉장히 편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이 느낌이 좋아 다시 도전해고픈 마음이 이는 걸지도.

축추 한 날씨에 따뜻한 커피 한잔이 간절하다. Iria Flavia에서 Padrón으로 살짝 둘러가는 루트에서 나는 커피 한잔을 마시고 걷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Padrón 이 커다랗게 쓰인 카페로 들어갔다. 그리고 Cafe solo(에스프레소 샷)을 한잔 시켰다. 아주 조그맣고 달콤해 보이는 도넛과 함께 내준다. 어... 왜 이렇게 맛있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마신 커피들 대부분이 나쁘지 않았음에도 이건 너무... 맛있는데?!! 마지막날이라 주는 선물인가 싶은 마음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아... 나가기 싫다... 맛있는 커피를 한잔만 마시긴 그래서 Cafe con leche(에스프레소 샷에 우유가 추가된 것, 보통의 라테보다 사이즈가 작다)을 한잔 더 시켰다. 같이 따라 나온 도넛은 작고 맛있어서 두 개를 먹는 게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움직이기 싫은 마음이지만 계속 들어오는 손님들에 자리를 비켜주고 발걸음을 뗐다. 어둠이 아직 걷히지 않은 길을 멀리 보이는 순례자들과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둠이 걷히고 차들이 움직이고 다시 아침이 밝았다. 비가 잦아들어 우의를 벗고 걸었다. 적당히 앞의 순례자들과 거리감을 유지하며 걸었다. 오늘의 분위기는 혼자 걷는 게 딱이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리 했다. 순례길에서는 모든 게 내 뜻대로 이루어진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가 함께 하고 싶다면 살짝 손을 내밀어보기도 하고. 세상과의 그런 적당한 거리감이 꽤나 좋았다.


순례길에서의 더 생생한 이야기는 아래의 유튜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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