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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인 Oct 28. 2024

내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갈5:1-12)

2024/10/28(월), 생명의 삶 PLUS QT

개인 QT 적용 

당대, 이방인들은 할례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너네가 할례를 받아야 진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는 것이다.'라는 말로 현혹하였다. 바울은 이에 대항하여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끝까지 선포한다. 


내 삶에서도, 어떤 때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나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 것 같다. <강해 설교> 글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시며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다른 인격과 정체성을 가지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와닿는다. 내가 처한 위치에서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할까? 


신대원에 입학한 후 오히려 내 힘으로 무언가 해내고자 했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입학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입학을 결졍했지만, 입학 한 후에는 꼭 취업 전선에 뛰어든 취준생 처럼, 혹은 직업 훈련 학교에서 훈련받는 자 처럼 마음이 어려웠던 순간들이 있다. 


나의 쓰임새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믿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내가 무언가 해야 할 때인데 안하고 있는건가?'라는 생각에 자주 조급해져왔다. '제가 무언가 준비해야 되지 않나요? 지금 주님이 주셨던 비전의 방향과 관련된 자격증이라도 따야할까요?'라고 묻는 내게 하나님은 '내가 부를 때 순종하리라 믿는다.' 라는 마음을 주셨다. 그리고 때가되면 하나님이 길을 여시고 청빙 지원을 하게끔 하시겠지 라는 믿음이 생기곤 했다. 


그런 주님의 응답 속에서도 조급한 마음은 쉬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아직 한 번도 청빙 지원을 해본 적이 없다. 신대원 입학 전, 추천서를 써주셨던 목사님께서 내게 조언해 주시길 '신학 학부 전공이아니었기 때문에 1년은 제대로 공부하고 사역지로 나가는게 도움이 될거다. 기초를 잘 쌓아야 한다.'라는 말을 따라, 일부러 입학 전 다른 교역자에게 받은 교회 면접 제안을 거절하고 1학기 동안 학교 공부에 집중했다. 


내 결정으로 공부만 했음에도, 입학과 동시에 사역하는 다른 동기들, 학부 때 부터 전도사 사역을 해 오던 동기들, 나보다 10살이 어린 전도사님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조급함과 열등감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때까지 열심히 인생을 살아왔고 그에 걸맞는 성과들 이루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신대원에 오니 0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어 작아지곤 했다. 더욱이 나보다도 더 어린데 학부 때부터 신학을 공부해온 동생들과 이미 전도사 사역을 몇년 째 하고 있는 이들을 보면 마음의 갈등은 더욱 커졌다. 그것에 더불어 신대원에 34살에 입학한 내 나이가 마냥 젊은 나이는 아니었던지라 '나이값을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더 마음이 어려웠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것을 신경쓰는 성격 탓에 만학도이지만 역량은 있는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남의 시선이 뭐가 중요하냐.'라고 쉽게 말할 수는 있겠지만, 내 뜻대로 내 마음이 정돈되지 않았다. 신학과 교회 사역쪽으로는 교역자 경험이 없는데, 나이는 더 많으니 스스로 답답했다. 


물론 신대원 동기들의 나이대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나는 초중반의 나이에 속했다. 4-60대 분들도 많으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서(회사에서도) 어린 동생들과 업무를 해본적이 없어서 더욱 정서적으로 거부감이 컸던 것 같다. (내가 근무한 회사 특성상, 만34세인 내 또래가 나이로는 여전히 사내에서 막내의 위치에 있었다. 내 또래가 회사의 문을 닫고 들어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혹시, 사역지를 구할 때 '내 나이가 문제되면 어쩌지?' 라는 고민과 또 한편으로는 '이때까지 수평적이고 워라벨 좋은 외국계에서 회사생활을 하다 신대원에 왔는데, 이제 와서 한국계 기업보다 수직적이라는 교회 조직 안에서 생활을 해야 하는 걸까?'라는 고민, 그리고 어리지 않은 나이에 신대원에 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스스로 열등감이 일어나곤 했다. 기도를 하고 몸부림 쳐도 '잘하고 싶다'는 마음과 '조급함'이 쉽게 사그라 들지 않았다. 내 마음을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기 때문에 '이런 내가 사람을 품은 교역자가 될 수 있는 걸까?'라는 의심이 더욱 커지고 답답해지기도 하는 시간들이었다.  


오늘 큐티를 하며, 그 때 들었던 하나님의 응답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된다.

하나님은 "저 같이 부족한 인간이 어떻게 사역을 할 수 있겠습니까.확실한 사명을 주지 않으면 이 길을 어떻게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에 대한 사명을 주셨다.  "그들이 내게 울부짖는다. 그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너를 준비시킨다."라는 것이 주님이 주신 응답이었다.


그러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알았기 떄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내 스스로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고 나서 오히려 '사회복지자 자격증을 딸까?' 등등 '말씀 자체'보다 다른 것들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할례를 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의 선포처럼, 내 마음가운데에서도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만 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때에 맞춰 나에게 마음을 주시고 준비시키시며 주님의 일들을 이뤄 가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올해 1학기를 잘 마치고, 나는 결국 시험관 시술을 이유로 2학기에 휴학을하게 되었다. 나의 커리어가 매우 중요하던 내게 그 사건은 너무나 속상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에서 아이를 낳을 것이라면 그리고 더욱이 내가 난임이라면 아이를 갖기 위한 노력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결정한 일이었다. 특히나 신대원은 단순히 학문을 위한 대학원이 아니다 '취업 훈련 기관'과 같은 느낌이다. 학업 일정과 영성 훈련들이 빡빡하고, 1학년 2학기 때 부터는 교회사역을 해야 하는 것이 필수 교칙이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2학기를 진행할 수 없겠다는 결정을 하게됐다. 


교회 입장에서는 어떨까? 내가 사역을 하면서 시험관 시술을 이유로 양해를 구하며 내가 원하는 일정대로 사역을 할 수 있을까? 교회 마다 다르겠지만, 그렇게 양해를 구하며 사역을 하는 모습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헌신해야 할 자리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내 사정이 받아들여지길 요구하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첫 사역이라면 더욱 더 제대로 시작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휴학을 하고 온전히 시험관 시술에 집중하게 되었다. 


현재 첫 시험관 시술, 배아 이식 후 9일차 이다. 임신테스트기의 선명한 2줄을 확인하며 감사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앞으로 임신확정까지 조금의 일정이 더 남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징표 속에 '하나님은 다 뜻이 있으시구나. 왜 그렇게 혼자 무언가를 하려고 애를 썼을까. 왜 그렇게 마음을 조급하게 먹으며 스스로 달달 볶고 심각하게 생각했을까.' 괜히 머쓱 해지곤 한다. 이미 하나님이 내게 가장 선한 길들을 준비하셨는데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잔뜩 떼를 쓰다가, 뒤 늦게 큰 탈 없이 모두 내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됐을 때 느끼는 머쓱함 이라고 해야할까. 


이제서야, 아 하나님께서 때가되면 사역을 하게 하실거라는 마음을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었을까? 내게는 가정을 바르게 세우는 일이 앞으로 사역을 할 때에 가장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은 창세기에서 말씀하신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 뜻이 있으시구나.' 감사하고 믿지못하고 스스로 조급만 해 하던 내 모습이 부끄럽고 주님앞에 죄송하다. 


하나님은 내 있는 그대로를 들어 쓰실 거다. 부족함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바꾸어 나가실 것이다. 내 스스로 인생의 키를 잡고 나아가려는 노력들을 멈추고 하나님께 내 인생을 좀 더 맡겨 드릴 수 있기를, 구하고 구해본다. 

 

성경 본문 (갈라디아서 5:1-12)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말씀 주해,설교 (생명의삶 PLUS)

할례가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만 효력이 있다.' 바울은 율법과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할례를 통해 율법의 권세에 들어가기로 선택한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것이며 '은혜에서 떨어지는'것과 같다.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을 통해'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 불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영향을 받는 영역을 포기하는 것이다. 할레를 받는다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이 '아무 유익이 없게'된다.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4절)

갈라디아 성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교사들에게 미혹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영적 열등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세속적이고 헛된 가치관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믿는 자는 모두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믿음의 경주를 멈추지 말라(5-10절)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푯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복음 뿐이다. 그 길에서 결코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대적과 박해를 두려워 말라 (11-12절)

바울을 박해한 사람들은 유대인이었다. 만약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전했다면 유대인들에게 박해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참된 진리인 '십자가'를 전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신다.

우리가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다른 인격과 정체성을 가지려고 할 필요가 없다.

모두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며,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따라서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할 지 살펴야 한다. 


- 2024/10/28 (월), 생명의삶PLUS QUIET TIME, 갈라디아 5:1-12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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