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거리가 국거리인 이유는 있었다
"어머님, 떡국은 제가 쒀 갈게요."
7년 전, 나에게도 시댁이 생겼다.
그런데 새해가 밝았다고 인사를 드리러 찾아뵙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그동안은 오면 귀찮다는 말씀을 믿는 척했다. 못 이기는 척 믿었다. 덕분에 새해 첫날이 늘 편했다.
결혼식(을 12월에 했다.)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해가 밝았으니 당연히 시댁에 새해 문안인사를 드리러 가야 한다는 우리 부모님의 말씀대로 찾아뵈려고 했었다. 하지만 손윗동서가 하지 않는 행동이라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도 시부모님께서는 안 와도 된다고 말씀하셨고, 곧 설이니 그때 보자 하셨다.
기억엔, 그래서 시부모님께 세배하는 영상을 찍어 보내드렸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알듯 시부모님 복이 상당히 있는 편이다. 남편과 헤어지지 못한 이유에 시부모님 지분도 꽤나 있을 정도니.
11개월 전, 아들이 태어났다.
코로나 시대에 태어난 아들은 생후 50일에 코로나에 걸리는 역사를 썼다. 그러고 나니 시부모님께서는 더욱 아기를 보기 조심스러워해 주셨다. 정말 감사했다. 먼저 그렇게 조심스러워해 주시니 내가 덜 죄송해도 되었다. 덕분에 100일이 다 되어서야 손자를 안아보실 수 있었다. 시어머니가 안고 계신 아기의 발 밑에서 작디작은 두 발을 소중하게 살며시 감싸주시는 아버님의 모습에 뭉클했다. 얼마나 그 순간을 기다리셨는지가 코 끝으로 전해졌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와 남편은 약속했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아들을 데리고 시가에 가기로.
그리고 지금까지 잘 지켜내고 있다. 갈 때마다 마음이 참 좋고, 돌아오는 길 양손은 늘 무겁다.
난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 왜인지 모르게 효도에 대한 관점에 변화가 생겼다.
'거창하게 잘하려고 기다리지 말고, 순간순간에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바로 하자.'
새해가 밝기 며칠 전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려 신정에 찾아뵙겠다 말씀드리며 떡국을 쒀 가겠다 했다.
한사코 사양하셨지만 이번엔 내가 이겼다. 늘 못 이기는 척 어머님 말씀에 '네, 알겠습니다.' 해 온 며느리지만 이번에는 꼭 떡국을 쒀드리고 싶었다. 예쁜 떡국떡도 사놨겠다, 아침에 늦잠만 안 자면 문제없겠어.
그리고 마침내 새해 아침이 왔다.
아침 9시가 되기도 전에 아기가 일어났고 남편과 나는 역할을 교대했다.
11시 30분에 출발 예정이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1. 아기의 낮잠 주기는 3시간 간격이니 출발해서 카시트에서 재우면 되겠군.
아주 딱이야.
2. 가장 먼저 고기를 볶아 육수를 만들고, 국물이 우러나는 40분 동안 달걀지단을 만들면 되겠어.
그 시간이면 충분하지.
3. 아, 아기 아침을 먹여야 하네. 내가 준비를 해주고, 남편이 먹이면 되겠어. 오, 좋아.
3. 고명으로 넣을 김을 챙기고, 파도 미리 썰어서 준비해 가야지. 예쁜 떡국 떡도 잊으면 안 돼.
업무를 하는 듯 나노 단위로 쪼개서 계획을 세우는 나를 보고 있자니 긴장 좀 했구나 싶었다.
맛있게 만들고 싶었고, 실패 없이 해내고 싶은 마음에 평소 멸시하던 남편의 최애 만능 고체 육수에도 손을 대고야 말았다. 나의 요리 전통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어제 골라 온 한우 국거리 500g을 넣고, 참기름과 들기름을 살짝 넣어 고기를 볶았다. 다 익어갈 즈음, 설레는 마음으로 회색빛 고기를 입에 넣어 보았다. 기미상궁이 된 기분이었다. 왕께 올릴 상을 차리고 먼저 맛을 볼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재밌는 상상을 하며 고기를 씹었다. 여러 번 씹었다. 목구멍이 열리질 않는다. 아직 들어올 때가 아니라며 더 잘게 씹어서 보내라고 한다. 오메, 망했다. 급하게 SOS를 칠 데가 남편밖에 없다. 그에게 망했다는 선입견을 주지 않으려 최대한 우아하게 여유 있어 보이게 남편을 불렀다.
"여보, 와서 고기 좀 먹어봐 줘요."
제일 질길 것 같은 덩어리를 골라 입에 넣어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나 스스로를 극한 상황에 내모는 것을 선호한다. 모 아니면 도. 확실한 답을 얻기 위해서다.
"좀 질기네? 왜 질기지? 너무 오래 볶았나? 한우가 왜 이래?? 아, 이거 아빠 못 드실 것 같은데."
아버님의 이는 틀니와 임플란트로 이루어져 있어 질긴 고기는 부담스러우실 게 당연하다.
망했다. 시간은 벌써 9시 40분. 시계가 말했다. "넌 끝났어, 인마."
집에 있지도 않은 초침시계 소리가 들렸다. 째깍째깍. 사고 회로는 닫힌 채 눈알만 굴러가고 있었다.
영원히 멈춰있을 것만 같았던 내 짱구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고기를 뺄까? 육수만 우려서 만두를 넣어? 그럼 저 고기는? 버려? 아, 고기가 있어야 맛있잖아.
옛날꼿날 수업시간에 어쭙잖게 주워들은 SWOT 분석이 떠올랐다. 난데없이 SWOT가 웬 말이냐고.
어쩌면 남편에게 SOS를 치던 순간부터 시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신속하게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해내는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확신했다.
S(강점, 내부, 통제 가능) : 집에 고기를 대체할 만두가 있음
W(약점, 내부, 통제 가능) : 만두 양이 쥐꼬리만큼임
O(강점, 외부, 통제 불가능) : 출발까지 1시간 50분가량 남음/ 얼마 전 대형식자재마트가 집 근처에 생김
T(위협, 외부, 통제 불가능) : 두 배로 빨리 가는 시간/ 마트 휴점 가능성 있음
내 실력으로는 겨우 1차 분석만이 가능했고, 다행히 이 안에서 나는 해답을 찾았다.
내가 내린 답은 아래와 같다.
마트 휴점 확인 후, 남편이 고기를 새로 사 온다. 그동안 내가 아기 아침밥을 먹이며 기다린다.
이렇게 하면 버리는 시간 없이 준비해서 떡국 흉내는 낼 수 있겠다 싶었다. 오늘 조금 더 일찍 깬 것이 신의 한 수였다. 효자 태봉이가 엄마를 살렸다.
서둘러 나가는 남편의 뒤통수에 대고 "조심해서 빨리 갔다 와!"라며 급한 마음을 공유했다.
고맙게도 오늘 잘 해내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아차린 남편이 양지를 잘 골라왔다.
호수 위에 떠있는 백조처럼 바지런히 움직여 다행히도 우리는 거의 제시간에 출발했다.
이게 다 나의 체계적인 분석 덕분이다. 어찌 됐든 성공했으니 분석이 아주 잘 된 걸로.
하지만 바쁘게 나가느라 놓고 간 달걀지단이 우리를 불러 세우는 바람에 2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이 때는 SWOT분석을 안 했다. 돌아가는 방법 말곤 없다고 판단했다. 늦을 운명이었나 보다.
늦을 줄 모르고 도착 시간에 맞춰 미리 나와계셨던 아버님께서 우릴 맞아주셨다.
할아버지가 안아주시려 하자 낯을 가리는 아기는 이번에도 울락 말락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조금 시간이 지나고 할아버지 얼굴을 익히려 빤히 쳐다보는 시간을 몇 번 가진 후에는 아주 잘 놀았다.
시어머니와 나는 떡국을 재정비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아기가 한 달 새 더 늘어난 개인기를 보이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품에 안겨도 더는 울지 않게 되니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져 왔다. 그래도 3주 후면 설날이라 곧 또 뵐 수 있으니 평소보단 덜 아쉬웠다.
즐거웠던 순간들을 복기하며 집에 돌아오니 질긴 국거리 고기로 끓여 망친 육수가 우릴 반겨줬다.
그래도 한우인데, 나라도 먹어치워야지 하고 다시 펄펄 끓인 다음 욕할 준비를 하고 고기를 건져 먹었다.
어라. 왜 부드러워? 왜 안 질겨?
더 큰 덩어리, 딱딱하게 생긴 덩어리도 다 헤집어가며 먹어보았다. 고기는 아주 부드러웠고 목구멍도 잘 열렸다. 그리고 드는 생각.
'끓이면 끓일수록 부드러워지는 건가?'
'아, 그래서 국거리?'
"예, 솊!"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낸 <파스타>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이 났다.
주방 막내인 공효진은 파스타의 익힘 정도가 적당하지 않아 계속 실패하고 실패한다.
실패한 면들은 주방조리대 안에 버려진다. 그리고 계속되는 실패. 그러다 한참 후에 공효진은 버린 면들을 집어서 먹어보게 된다. 알단테(소스에 버무려진 파스타가 고객에게 서빙되었을 때서야 면이 완전히 익도록, 면을 덜 익히는 조리법의 이름)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다. 바로 시간이다. 실패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늦게 깨달은 것 뿐이다. 나 또한 그랬다.
새해 첫날, 국거리 고기가 가진 깊은 뜻을 배웠다.
아무래도 2023년은 기다림에 관대해지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사진 쌀집아줌마 공식홈페이지, 픽사베이